"(내 삶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별세 전 6·25 전쟁 영웅 미국인 윌리엄 웨버 대령의 유언을 명심하자.
오늘의 선진국 대한민국 배후에는 한국 전쟁에서 목숨을 받친 자유세계인들의 희생이 있다.
2022년 현충일을 맞이하여 오늘날 선진국 위상에까지 오른 대한민국에 살면서 자유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받친 군인들의 희생을 묵상해 본다. 특히 미국인 웨버 대령의 삶, 6.26 전쟁시 한국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팔과 다리를 잃고 여생을 한국의 자유 통일을 위해 헌신한 모습에 감동과 찬사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위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묘소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미국인들이 얻은 자유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희생이 따랐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시에 자유가 지켜지기 위해서 수백만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오늘날 강대국 중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미국 편에 서는 국가들이 많은 것은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등 군사력이 약한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생명부지의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3만 6천여명의 용사들이 목숨을 바쳤다. 우리가 미국인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샬롬나비는 "내 삶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국전쟁 참가 전투원으로서 마지막 말을 하고 별세한 한국전 영웅 웨버 대령을 추모하면서 남겨진 우리들은 인종과 국가를 넘어선 그의 위대한 현충 정신을 기리면서 다음같이 그를 추모한다.
1.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과 헌신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윌리엄 웨버 대령은 미 공수부대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한 1951년 중공군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에 팔과 다리를 잃는 상황에서도 강원도 원주 북쪽 324고지 전투를 이끌었다.
웨버 대령은 2021년 6월 조선일보 기자와 세 차례 화상과 전화로 인터뷰했을 때 자신이 부상(負傷)했던 '원주 전투'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70년 전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1951년 2월 전략적 요충지인 원주 고지를 지키기 위해 매복했다. 이튿날 새벽 중공군이 호각과 나팔 소리를 울리며 진격해왔다. 기습 공격으로 한 차례 중공군을 격퇴했지만, 수백명의 중공군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그러던 중 참호에 중공군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급히 오른손으로 잡아 밖으로 던지려 했을 때 수류탄이 폭발했다. 오른쪽 팔이 날아갔지만,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다음 날 참호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오른쪽 다리도 부상당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혹한(酷寒)은 흐르던 피가 얼어서 굳어버릴 정도로 끔찍했다." 이 전투에서 중대원 42명이 전사하고 64명이 다쳤다. 그의 부대는 사흘간 방어 끝에 중공군을 몰아냈다. 미국으로 후송된 그는 1년여 입원했고, 1군 사령부 부관으로 복귀했다. 이후 베트남전에도 자원해 참전했다. 퇴역 후에는 6·25전쟁과 참전 군인의 무공을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2. 웨버 대령의 생애야말로 69년된 한미동맹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웨버 대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공수 낙하산부대 작전 장교(대위)로 참전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 등에 참여했다. 웨버 대령은 1951년 2월 강원도 원주 북쪽 324고지에서 중공군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에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으면서 전투를 이끌었다. 그는 부상당한 팔과 다리에 대하여 1년여 간의 수술 뒤 현역으로 복귀했다가 1980년 전역했다. 퇴역 후에는 6·25전쟁과 참전 군인의 무공을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쳐 전쟁 영웅으로 불리웠다. 이후 웨버 대령은 1993년부터 참전용사기념재단 회장을 맡아 미 워싱턴DC의 한국전 참전비(19인상) 건립을 주도했고, 2006년부터 '6·25전쟁 추모의 벽'(2021년 기공) 건립운동을 벌였다. 웨버 대령은 생전에 "미국은 많은 국가의 국민들을 돕기 위해 여러 전쟁에 참전해왔지만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한 분들은 한국인이었다"고 한국인들에 대한 감사를 말하기도 했다.
6·25 전쟁 영웅 윌리엄 웨버(97) 미 예비역 육군 대령은 전후(戰後)부터 최근까지 6·25 전쟁 미군 전사자 3만6595명, 한국군 지원부대(카투사) 전사자 7174명 등 총 4만3000여 명의 이름을 모두 새긴 '추모의 벽'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지난 9일(현지 시각) 별세하기 4시간 전 "(내 삶의) 임무를 완수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병상에 누워 마무리 작업에 들어선 추모의 벽 최근 사진을 보자 그는 눈을 크게 뜬 뒤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처장은 "웨버 대령은 참전부터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도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기억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분"이라며 "정부는 고인의 뜻을 잊지 않고 혈맹으로 맺어진 한미동맹이 미래 세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3. 미국인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서 한국의 자유 통일을 염원한 웨버의 정신은 위대하다.
딸 베스 웨버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당일 '여전히 남북이 통일이 안 되고 분단돼 있는 사실이 안타깝다' '통일된 한국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어 "(같은 날) 아버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비판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셨다"며 "그는 끝까지 의식이 명료했다. 아버지는 강한 군인이었다"고 회고했다. 피와 살이 섞이지 않았으나, 한국인의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잃은 이 전쟁 영웅의 현충 정신은 대한민국의 피와 살을 받은 한국인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오늘날 현충일에 우리 한국인, 특히 젊은 세대는 웨버의 현충 정신에서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현충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4. 웨버 대령의 삶과 정신을 새기면서 한국인들은 약화된 6.25 전쟁 기억과 현충정신을 각성하자.
한국 역시 비슷한 세대가 6·25 전쟁을 겪었다. 동족 상잔의 비극 속에 3000만 인구 중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됐다. 가족 중 전쟁 피해자 없는 이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2차 대전 참상과 비교해 그 강도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런 전쟁을 겪은 수백만명이 아직 생존해 있다. 그런데 6.25 전쟁은 북침 전쟁이라는 종북 주사파들의 거짓 정보가 버젓이 돌아 다닌다. 한국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철저히 '남의 일'로 외면당한다.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50명 의원이 출석한 사실만 봐도 우리 국회의원들의 의식이 흐트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일본과 비교하면 전쟁에 대한 기억이 조직적으로 억압 당한 결과는 아닐까.
5. 3대로 이어가는 웨버가(딸 배스, 손녀 데인)의 한국 사랑은 귀감이다.
웨버 대령의 딸 배스 웨버는 조선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정말 건강하셨다. 지금도 떠나신 게 믿기지 않는다"며 "97세 고령에도 올여름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바뀐 한국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며 "마지막까지 한국을 생각하신 것"이라고 울먹였다. 딸 배스 웨버는 "아버지의 업적과 활동은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며 "한국에 대해 더 잘 아는 계기가 됐다"고 피력했다.
웨버 대령의 손녀인 데인 웨버(32)는 5세 때인 1995년 할아버지를 따라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호주에서 열린 6·25 행사에도 함께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6·25전쟁 참전 용사 후손들의 봉사 모임인 '한국전 참전 용사 청년봉사단'(KWV Youth Corps) 회장으로 활동했다. 손녀 데인은 과거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팔과 다리를 잃었지만 내가 믿는 것을 위해 싸웠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손녀 대인은 "6·25전쟁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참전 용사 후손들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난 2월에는 한미 동맹과 관련된 행사에 참석해 "미국의 젊은 세대에게 6·25전쟁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이 3대(代)째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대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유산의 계승은 우리 한국인 젊은 세대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6. 한국교회는 현충일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자유를 지키는 현충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자
한국교회는 현충일 자유를 위하여 묵숨을 바친 전사자들을 기억하고 그 유족들을 위로하는 화목과 위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성경은 무너진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예레미아, 에스더, 느헤미아, 다니엘, 바울 등 믿음의 선조들의 조국애와 행동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신앙의 자유는 없다. 우리가 자유를 지키는 정부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는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6.25 전쟁시 신앙과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순교한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있다. 교회는 이들이 뿌린 피의 씨앗으로 지켜지고 퍼지고 성장한다.
2022년 6월 3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