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 성형수술의 중심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다방면에서 손재주가 탁월한 한국인이 의술 분야에서까지 그 우수성을 세계 속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같은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뿌듯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산물이라면 그 소식을 마냥 기뻐할 수 만은 없습니다.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그릇된 풍조에 뿌리를 두고 자라난 결과라면 기쁨 보다는 우려가 됩니다.

일전에 서울을 방문하고 온 어느 외국인은 길 거리의 한국 여자들이 모두 다 예쁜데 한 가지 흠은 여성들의 얼굴이 천편일률적으로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미의 평준화를 이루었다고나 할까요.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외적인 것에 대하여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치중할까요? 그 이유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능가한다고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외적으로 눈에 띄어야 입사도 수월하고, 승진도 하며, 연애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를 포장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투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모 뿐만 아니라 가짜 학위를 가지고 스스로를 포장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나중에 들키더라도 우선은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이루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일반 사람들 가운데 두루 퍼져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풍조 가운데 교회와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얼마전 언론 보도를 보니 가짜 박사 학위를 가진 직업군 가운데 목회자들이 1위를 했다는 서글픈 통계가 나왔습니다. 특별히 미국에서 받은 학위 가운데 가짜가 많다는 통계를 보고 미국에 살며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기에 더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해보면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며, 거기에다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담이 가는지를 뼈져리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너무나 쉽게 학위를 취득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같은 목회자들끼리 가짜 학위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이 떠도는 것을 대하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초기 사역을 시작 하실 때 그분이 가진 외적인 조건 때문에 대중들은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반면에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세례요한을 찾아가 그가 성경에 예언된 오실 메시야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종교 지도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찮은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외적인 조건 때문에 나다나엘 같은 제자는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하자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도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분을 메시야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놀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예수님의 출신성분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외적인 조건만 보고 그분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하고 다녔던 외적인 조건을 모두 다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당시 가장 탁월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학문적 배경, 어느 곳에서나 당당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는 로마시민권,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게 인정받던 종교적 열심,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미련없이 버렸습니다. 그것도 당시의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왜 바울은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외적으로 나타난 예수가 아니라 그속에 숨겨진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선물을 받을 때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받으면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포장에 비해 속에 들어있는 선물이 신통치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별 것 아닌 것을 과대하게 포장해서 건내주면 받는 사람의 마음이 더 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받은 선물에 자신이 속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겉포장이 그럴듯 한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얼마가지 않아 불편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겉모습은 볼품이 없는데 가까이 사귀어 보면 소록소록 재미가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 코를 다치기 십상입니다. 실재로 속이 꽉 찬 사람들은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 눈에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형편없고 보잘것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속이 꽉 차있었던 교수님 한 분이 생각납니다. 모두들 서슬퍼런 유신독재 아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해야 교수의 자리를 겨우 보전하던 때 그 교수님은 제자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몸으로 막아 주셨던 분입니다. 평소에 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허름하여 동료 교수들에게 교수가 아니라 기인으로 취급받던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제자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술을 잔뜩 먹고 학생주임 교수의 집 문을 발로 차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만 박사냐! 나도 박사다! 너 나중에 우리 제자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이런 짓을 하냐!”

밤새도록 그 집 앞에서 대문을 발로 차며 농성 아닌 농성을 벌려서 결국 제자들을 구제 해 주신 분이십니다. 당시에 다른 교수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하셨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제자들에게는 큰 스승이요 큰 어른으로 인정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가짜 박사들 가운데 진짜 박사님을 만나는 기쁨이 제자들 속에 넘쳤으니까요.

이 가을에는 포장된 내가 아니라 실재의 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발견한 나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성장시켜가는 기쁨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