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유대인을 학살한 곳이다. 독일군이 600만 명을 학살했다고는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제정신을 가지고는 도저히 실행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정부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독일 군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 화장실을 많이 짓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32,000명이나 수용되어 있었던 어느 포로수용소에는 화장실이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하루에 한 사람 당 10분씩 단 두 번만 화장실을 가도록 허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장실이 있었으나, 그 화장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밥을 먹는 식기로 사용하는 깡통에다 대변을 보기 시작했다. 낮이나 밤이나 식사시간에는 깡통에다 배식을 받아 식사를 하고, 식사시간이 아닌 때에는 깡통에 대변을 받아두었다가 화장실에 가서 비우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그들 주변은 온통 오물과 배설물로 가득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통로에 배설물이 가득 놓여있어서 사람들은 그 배설물을 치우면서 걸어가야만 했다.

자연히 저들의 온 몸은 배설물로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머리는 짧게 깎고, 복장은 죄수복을 하고, 온 몸은 배설물로 더럽혀지니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도 점점 짐승처럼 비참해지고 말았다.

이 일을 맡은 독일 군인들도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참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어느 날 이 일을 담당하던 독일 군인이 장교에게 물었다. “이왕 죽을 사람들인데 왜 저렇게까지 비참하게 하십니까?” 그 때 독일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다 너희들의 양심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짐승을 죽이는 일은 조금 쉽다.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쉬우며,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보다는 개구리나 뱀을 죽이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 말은 배설물로 저들의 몸과 주변을 아주 더럽게 함으로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짐승처럼 만들게 되면, 그때 그들을 죽인다고 해도 그다지 마음에 큰 가책이 되지 않고, 그 비참한 가운데 있는 유대인 자신들도 차라리 빨리 죽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모저모로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악한 환경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터득한 몇 가지 생존의 원칙을 지켜서 살아남게 됐다.

생존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빵의 원칙이었다. 빵 한 부스러기라도 더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팔 하나라도 움직이는 것은 극도로 절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운동이 지나치면 체력이 감당 못하니까 자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칙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생존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잊지 않고 세수를 해야만 한다는 원칙이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는 오후 4시30분이 되면 모두에게 커피 한잔이 배급됐다.

말이 커피 물이지 그 물은 악취가 나는 물이었다. 그러나 그 물의 중요성은 따뜻하다는 데 있었다. 추위와 먹지 못해서 열량을 빼앗기던 사람들이 따뜻한 물로 자기 몸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깨달은 두 번째 원칙은, 그 커피 물을 반만 마시고 반컵의 물로 세수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모른 채, 반 컵의 물로 세수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된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4시30분에 커피가 배급되면 반만 마시고 반 컵의 물은 남겨서 죄수복의 한 귀퉁이를 찢어 이 물에 적셔 이를 닦고 얼굴을 닦고 온 몸을 닦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물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반 컵으로 배설물로 더럽혀진 온 몸을 어떻게 다 씻을 수가 있었겠나?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세수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 컵의 물로 세수를 하는 사람은 어떻게 계속 살게 될 지 그 이유를 몰랐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그들은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정신이 생명력이 되어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출신 생존자 ‘레빈스카’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우리를 짐승처럼 만들려는 저들의 음모를 깨달은 후에, 나는 속에서 '살아야겠다'는 생명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반 컵의 물로 세수하였던 우리는 ‘만일 우리가 죽더라도 저들이 바라는 대로 짐승으로 죽지는 않겠다. 죽더라도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겠다’는 각오로 살아갔기에 다 살아남게 되었다.”

반 컵의 물만 마시고, 나머지 생명과 같은 반 컵의 물로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면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자기를 지키고 있는 독일 군인을 쳐다보았다. 여기엔 소리 없는 무서운 외침이 숨어 있었다. “봐라!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독일이 저지른 잘못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도 다 죽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유도 다 죽여서, 인간을 짐승처럼 만든 다음, 그 인간을 짐승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마음대로 죽였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것을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 앞에 등장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사건에 적용하여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그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짐승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격으로 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큰 복이요 사랑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