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선교팀은 바보(Paphos)에서 배를 타고 버가(Perga)로 갔습니다. 그들은 버가에 머물지 않고 서둘러 위험하고 어려운 타우러스(Taurus)산맥의 산길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갑니다. '버가(Perga)'라는 도시의 규모와 성격을 생각할 때 바울은 의도적으로 지나쳤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에게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급히 달려 가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함께 바울의 선교사역에 중요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습니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60여개의 도시를 재건하거나 새롭게 세웠습니다. 이 60여개 도시들은 군사적으로 요새화(Fortify)하고 문화적으로 헬라화(Hellenize)했습니다. 이 60여개 도시 중 16개 도시들 이름을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따라 안디옥이라 명명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안디옥은 아주 흔한 도시 이름이었습니다.
고대 역사학자 조세푸스는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의 6대왕인 안티오코스 6세가 바벨론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으로 대거 이동시켰습니다. 안티오코스 6세는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충성스럽게 지지해 줄 것으로 믿고 바벨론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2천 가정을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으로 강제 이주 정책을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B.C. 25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다시 정비되면서 로마 직할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은 소 아시아지역 첫 로마 직할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직할 도시가 된다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직할 도시 첫 번째 특징은 로마시민과 꼭 같은 혜택이 부여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로마의 예비역 군인들이 거주하는 군인 정착지가 됩니다. 세 번째 특징은 로마 황제 숭배 종교가 성행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이런 특징을 고스란히 가졌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하에서 한층 더 발전한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바울 당시 비시디아 지방의 수도였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헬라인 이방인들도 대거 거주하였던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 선교센터로서 비시디아 안디옥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을 처음 나타납니다(행13:48).
현재 터키 얄바츠로 불리는 비시디아 안디옥은 서 아시시아 지역에 복음이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었던 회당에서 바울은 처음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을 시작으로 바울이 1차 선교여행으로 거쳐 간 더베, 이고니온, 루스드라 지역이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회람문서였던 갈라디아서가 보내졌던 곳도 이런 지역들이라고 봅니다.
사도행전이나 사도 바울의 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대한 궁금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성서 고고학자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 많은 유적들을 발굴했습니다. 영국의 성서 고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는 사도행전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터키지역을 조사하다가 사도행전의 진실성을 믿고 기독교 신자가 됩니다.
윌리엄 램지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큰 학자가 되었습니다. 윌리엄 램지 박사는 50년간 성서지리의 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특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로마시대의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발굴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위험한 산길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왜 갔을까요? 고고학자들은 비시아 안디옥이 구브로 총독 서지오 바울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서지오 바울 이름이 각 지역에서 발굴된 비석들에 있었습니다. 구브로 비문은 그가 총독임을 밝혔고, 로마 비문은 그가 총독을 마치고 로마 관직(Curator)에 취임한 것을 알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비문은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권세 있는 지역 유지임을 밝힙니다.
베델 신학교 성서고고학 교수였던 칼 라스무센(Carl Rasmussen)박사는 서기오 바울 때문에 바울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성서고고학자인 팬트(Fant), 레디쉬(Reddish) 두 교수는 바울 때문에 믿게 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선교팀에게 자기 고향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러 신학자들은 서기오 바울이 고향 가족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선교팀이 전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다수의 유대인들과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다인종 사회였습니다. 로마 황실의 관심과 배려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비시디아 안디옥은 선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 더베 그리고 루스드라는 바울의 고난을 대표(딤후 3:11)합니다. 아울러 이 지역에 다수 분포했던 유대인들 영향으로 율법주의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런 경향을 지적하고 가르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래저래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행전과 바울 선교에 중요한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