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오르세미술관 한국전에는 고흐의 소품 한 점이 따라왔다. 애달픈 사연이 깃든 <아를의 반 고흐의 방(1889)>이란 유화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위해 그린 것으로 1889년 그가 생레미 요양원에서 나온 뒤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문, 의자, 침대, 세면대, 옷걸이가 보이는 평범한 방을 그린 것이다. 고흐는 세부(細部)를 생략하는 종전의 수법과 달리 이례적으로 벽에 걸린 풍경화, 나무마루 조각, 그리고 침대의 나무결까지, 흡사 돋보기로 사물을 들여다 보듯 꼬치꼬치 그렸다.

방 안은 그런대로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가제도구들이 없는 걸로 미루어 단기체류자가 머무는 여인숙이거나 셋집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무명의 고흐가 주택을 마련할 자금이 있을 리 없었고, 약값도 모자랐던 당시로서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계제가 못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나는 한동안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이 정지된 것 같았고 그런 침묵의 시간이 여러 날 흘렀다. 글쓰기가 힘들었다. 고흐가 느꼈을 무서운 고통, 두려움을 생각하니 착잡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방은 사실 고흐가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고갱과 다퉜고, 발작을 일으켰으며,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환기시킨다. 원치 않은 발작이 불쑥 찾아왔을 때 고흐 자신조차도 겁이 났고, 그의 말대로 “물이 너무 차서 강둑으로 기어오르려 애쓰는 것”처럼 회복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앓은 우울증에 대해 “나는 몹시 아팠다. 내 마음은 피곤하고, 내 영혼은 환멸을 느끼고 있고, 내 몸은 고통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적어도 내게 정신적인 힘과 또 강한 사랑의 본능을 주셨지만, 지금은 가장 쓰라린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공포와 더불어 살인적인 독이 내 질식한 심장 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고 아픔을 토로했다.

고흐가 요양원에서 나온 뒤 이 그림을 제작하면서 고흐는 “단순히 침실을 나타내고 색깔을 통해 쉼을 환기시키고 또 잠을 묘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분명 화면을 끌고가는 큰 기둥 줄거리는 그가 머무는 방 안 풍경이다. 침대와 잠, 그리고 쉼은 어딘지 통하는 데가 있다. 게다가 화면 색조는 평화로운 파랑색과 따뜻한 노란색으로 돼 있다. 바닥의 갈색 역시 차분하면서 편안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는 ‘쉼’을 목마르게 갈구했던 것 같다. 친구이자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대적인 휴식’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아픈 그로서는 무엇보다 건강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고, 정신적인 안식이 무엇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갈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그에게 ‘안식’이란 너무나 절실했던 소망이었다.

이 작품에 깃든 내용의 암시를 우리는 우측 상단에 걸린 두 점의 초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점 가운데 한 점은 고흐 자신의 초상화다. 면도를 한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다. 이 초상화를 걸어 두어 고흐 자신이 아무도 없는 방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구상하였다. 고흐가 방안의 관객이 되어 있는 셈이다. 다시는 공포에 떨거나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건강하게 살기를 고대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슬프고 처량한 자신을 위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래려고 한 고흐의 애틋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간결하고 단순한 구도로 되어 있다. 이렇게 단순한 그림을 왜 그렸을까 반문할 수도 있다. 감상하는 재미가 없다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고흐라는 한 인간이 겪은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순한 실내풍경으로 비출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픔을 극복하고 또 자신의 나약함을 바라보면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고흐의 나날을 처연하게 옮겨내고 있다. 병마와의 다툼을 그치고 마음의 평안을 갈구하는 고흐의 간절한 바람이 실려나오는 작품이기에 안쓰럽다.

고흐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가 찾고 있는 평안을 이미 주셨다고 믿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 평안이 특별히 혹독한 시련 때문에 괴로워하고, 가장 불안하고 가장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알고 있었는데 병마 때문에 잊어버린 것인지 자신의 오기로 인해 관심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든다.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치를 떠는 고통 속에서 고흐는 왜 완강한 내면의 기병(騎兵)들을 적극적으로 없애버리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고흐가 그의 병마보다 두려워해야 했던 것은 갈라진 논두렁처럼 갈갈이 찢긴 마음이 아니었을까 퍼뜩 그런 생각이 스쳐간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