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초기부터 성경적 창조론 위협 철학에 대응
창조 논쟁, 이론보다 세계관 전쟁이자 영적 싸움
인간, 본능적으로 처음 이야기에 관심 갖고 희구
창조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는 논쟁은, 오늘날 진화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인류가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한, 떠날 수 없는 해묵은 고전적 이슈이다. 그만큼 시대마다 대두되고 역사도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창조신앙을 철학적·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 그것이 지니는 인문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론적 논쟁이 아닌 세계관적 전쟁
교회는 초기 시대로부터 성경적 창조론을 위협하는 주변의 철학적 사유와 세계관에 대면해 있었다.
초대교회에는 헬라의 플라톤주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창조론을 위협하고 있었다. 즉 형이상은 원형의 세계로 영원, 불변, 완전, 선한 특징을 갖는 반면, 형이하는 그림자의 세계로 한시, 항변, 불완전, 악한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물질은 항존하기에 창조가 있다면 이는 유로부터의 창조이지,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스레 차등적 세계관으로 작동하여, 형이하의 자연세계나 물질세계를 경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비적 지식을 희구하는 영지주의는 역사성을 경시하고,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언급된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창조한 하등한 신인 조물주(Demiurge)로 이해하면서 성경에서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을 제한하고, 창조, 성육신, 몸의 부활 등의 핵심교리에 대해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위협적인 세계관은 헬라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세계관도 그 위협에 한몫을 더하였다.
헬라적 세계관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이었다면, 기원전 6세기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도덕적 이원론이었다. 이 우주엔 선신과 악신의 대결이 있다고 보았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위협적 세계관들에 대항하여 성경에 기반한 신앙고백을 창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인 것이다.
초대교회 창조신앙 고백의 핵심은 오직 스스로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 뿐(출 3:14)이며, 자연(自然)은 오직 타연(他然)일 뿐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주권과 자유의지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음을 믿었다. 이는 초대교회 창조 논쟁의 신학적 산물로 2세기 말부터 정통신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창조 논쟁의 이정에 있어 정통신앙의 시금석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창조론 이슈는 근본적으로 이론적 논쟁을 넘어 세계관의 전쟁이고 영적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창조신학에서 창조과학으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적 탐구는 자연철학적 범주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구사하는 자연과학에로 패러다임 전이가 일어난다.
이는 고대의 점성술(astrology)에서 근대의 천문학(astronomy)으로의 전이, 중세의 연금술(alchemy)에서 근대의 화학(chemistry)으로의 전이에서 볼 수 있다.
점성술이나 연금술의 관심들이 어떻게 하면 인생사의 길흉을 따져볼까, 인간이 어떻게 하면 오래 살까라는 자기중심적 기복에 있다면, 근대과학은 이러한 사심을 벗어나 객관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자연을 탐구하려는 시도였다.
창조론에 대한 탐구도 철학적·신학적 범주에서 자연스럽게 과학적 범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플라톤 철학이나 영지주의가 아닌 유물사관이나 진화론과 같은 근대적 도전들에 대해, 창조신앙을 가진 이들이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창조과학인 것이다.
고대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한 초대교회의 창조신학적 반론은 이원론적 사고의 영지주의가 자연 물질 세계를 경시하고 지나치게 영적 세계에만 사로잡히게 하는 영지주의적 사고를 경계하게 하였다.
자연 세계는 퇴화(devolution)하고 있다고 보며, 하나님을 제한하고 조물주로 격하시킨 것에 대한 성경적 대응이었다.
반면에 창조과학은 과학주의적 사고와 진화론에 대한 대응으로, 유물론적 사고로 자연 물질계에 지나치게 사로 잡혀 영적 세계에 무관심하고 자연세계는 진화(evolution)하여 간다고 보며, 자연 세계를 절대화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것에 대한 성경적 대응이었다.
결국 창조신앙은 이러한 양극단의 비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균형있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인생보다 더 큰 이야기: 인간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원에 관한 철학적·신학적·과학적 사유는 인간 현상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곧 인문학적 측면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초월적, 즉 자기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인생보다 더 큰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알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이야기하듯 시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좀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혹자가 표현하듯 40분 늦게 영화관에 도착한 관람객과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40분 늦게 영화를 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생각할 것이다. 당장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도 이전의 맥락 없이는 완전한 이해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의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간은 인생을 뛰어넘어, 보다 큰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초월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원으로부터 시작하는 전역사적 이해를 희구하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스토리텔러인 것이다.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과학자들은 그것을 근원적인 물질 간의 화학반응이나 단세포 동물의 출현, 그리고 빅뱅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으로 표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로 지적 바벨탑을 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신앙은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청종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박형진 교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고려대학교 (B.S., 생물학)
휫튼대학원 (M.A., 성서, 신학)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M.Div., 목회학)
프린스턴신학교(Th.M., Ph.D., 교회사, 선교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