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 표현했을 때,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실 수 없다'고 변호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처럼 그렇게 형편이 나쁘시다면, 그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형편없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서 떠나셨다고 느꼈을 때, 나를 도와 준 분은 바로 나와 함께 고난당하신 하나님이셨다."

위르겐 몰트만 박사(독일 튀빙겐대학교 전 교수)가 12일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김명용 박사)에서 열린 특별강연회에서 강사로 초청돼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지난 1964년 쓴 '희망의 신학' 50주년을 맞아, 이날 그 주요 사상들과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그는 '희망의 신학'이 단순히 '낙관주의' 혹은 '긍정적 사고'로만 이해되는 것에 대해, 진정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몰트만 박사는 "(십자가의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희망 없는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이라며 "'희망의 하나님'은 또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고난당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이해가 없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어가시면서 하나님께 외치셨던 탄원, 곧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이, 이해할 수 없는 일, 대답 없는 질문들, 그리고 구원 없는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됐다"며 "내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하나님의 떠남'을 겪었을 때, 예수께서 나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바로 이 탄원을 통해서였다. 그의 '함께 고난당하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게 했다"고 고백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십자가 신학의 전통에 따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또는 하나님과의 화해로서, 그리고 죄인에 대한 칭의로서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며 "그러나 이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과연 하나님께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의 독생자의 지상적 운명이 하나님을 냉혹하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몰트만 박사는 "이렇게 물으면 기독교 신론의 전통에서부터 '하나님의 무감각'에 관한 공리가 즉각 대응해 온다. 바로 하나님은 그 본성상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무감각적이며, 기쁨도 고난도, 사랑도 분노도 알지 못하신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정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또한 그의 하나님의 수난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의 영원한 고통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리에서 고난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신다"며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가운데,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또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심이 그의 영원한 자비이며, 그 자비로 인해 온 세계가 살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몰트만 박사는 "따라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의 감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고난에 불능한 하나님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며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롭게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기독교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여'"라고 강조했다.

"아파하고, 목마르며, 배고픈 신성"

장신대 김명용 총장 ⓒ김진영 기자
장신대 김명용 총장 ⓒ김진영 기자

한편 몰트만 박사의 제자이기도 한 장신대 총장 김명용 박사는 이날 '세상을 바꾼 신학-「희망의 신학」 50년, 몰트만 신학의 공헌에 대한 연구'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몰트만의 신학은 한 마디로 세계를 바꾼 신학이다. 그는 세계 신학의 방향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도 몰트만 박사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언급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연 귀중한 저술"이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의 문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참 하나님'이 어떻게 '참 사람'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참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참 인간은 전능하지 않고, 참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데, 참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이 복잡한 교리의 배후에는 신성과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헬라 철학이 들어 있다.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는 전제는 헬라 철학의 전제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며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는 헬라의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충돌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성 이해에 혁명을 요구하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확하게 계시돼 있다. 하나님의 아픔과 목마름, 하나님의 고통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됐다는 것"이라며 "칼케돈 신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성자이시고, 그분이 하나님 신성의 계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라고 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성과 다른 신성이 들어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성자라는 뜻"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김 박사는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자의 참 신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성자의 신성은 아파할 수 없는 신성이 아니라 아파하시는 신성이었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끼는 신성이자 고난 받고 죽으실 수 있는 신성"이라며 "우리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이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는 다른 낯선 어떤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끝으로 "몰트만의 신학은 신학 역사의 크고 큰 분수령이다. 물트만이 등장하기 이전의 신학과 몰트만이 등장한 이후의 신학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몰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론의 역사에 큰 혁명을 일으켰고, 헬라적으로 각인된 잘못된 신관을 고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입각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며 "몰트만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예정론과 신정론,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의 신학적 난제들을 그의 천재적 시각으로 해결했고, 바른 방향으로 세계 신학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