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어떤 인물인가? 가톨릭이 처한 대내외적 변화 요청에 보수적인가 개혁적인가? 이번 콘클라베의 가장 주된 초점은 유럽권 대 비유럽권이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권은 보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남미와 아프리카권은 개혁을 자처한 상황에서 누가 교황에 선출되느냐는 향후 가톨릭 변화에 가장 중요한 키였다.
프란치스코 1세의 가장 주된 배경은 남미 출신이란 점이다. 더 정확히는 남미 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배출된 교황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콘클라베의 주도권은 개혁 쪽이 쥐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제 성추문, 비밀 문건 유출 파문 등으로 위신이 떨어진 가톨릭을 조직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내부적 요청에 더해, 이제 흑인 내지는 남미 교황이 탄생할 때도 되었다는 시대적 요청이 한몫했다.
현재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23%만이 유럽인이며 남미는 무려 45%다. 프란치스코 1세를 배출한 아르헨티나는 전국민의 92%가 가톨릭 신자인, 대표적 가톨릭 국가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이 언제까지 교황직을 독식할 수는 없는 상황. 이번에 프란치스코 1세가 선출됨에 따라 주후 731년 시리아 출신의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비유럽권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콘클라베를 직전에 두고 남미 출신 후보보다는 흑인 출신이 주목받았다. 아프리카 가나의 피터 턱슨 추기경이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군에 들었으며 그 자신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언론들도 흑인 교황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 세력이 흑인 세력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개혁에 대한 요구와 남미의 거대한 교세 때문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1세는 남미 출신이며 남미에서 평생을 사역해 온 성직자이지만 그의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인 이민자다. 많은 언론들이 프란치스코 1세가 철도노동자의 아들 출신에서 교황에까지 올랐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혈통적 국적이 100% 이탈리아임은 간과하고 있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115명 중 28명으로 최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455년간 독식해오다 요한 바오로 2세 때부터 35년 동안 놓친 교황직을 다시 찾아 오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의 455년, 유럽의 1282년 교황직 독식이란 수식어로 인해 수구적 이미지로 비친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따라서 콘클라베의 선택은 바로 의외에 인물에게 집중됐다. 바로 프란치스코 1세다.
파격적 개혁을 외칠지도 모르는 흑인 교황보다는 그래도 온건한 개혁적 이미지를 비출 수 있는 남미 출신 교황이다. 게다가 그는 완벽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정도의 혈통상 100% 이탈리아인이기도 하다. 개혁과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프란치스코 1세에 호감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를 비롯한 보수적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은 새로운 교황에 상당한 만족을 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1세가 바티칸의 권위 실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그는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 신학적 이슈에 관해서는 강경보수파로 잘 알려져 있으나 대외적인 입장은 상당히 개혁적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벌써부터 파격적인 모습을 통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가 선택한 즉위명은 프란치스코다. 이는 청빈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가톨릭 성자 프란치스코 수사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교황도 사용한 적이 없다. 실제로 새 교황은 평소 근검 절약하는 삶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큰 저택을 마다하고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버스를 타고 다니고 직접 요리도 한다. 빈민가 활동도 그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프란치스코라는 즉위명을 선택한 것은 전세계의 가난한 빈곤층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교황에 선출된 후에도 여전히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으며 자신을 선출한 추기경들에게 “하느님께서 ‘날 교황에 선출한’ 당신들을 용서하시길 빈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소탈하다.
그가 50년 이상 몸담은 예수회도 이런 성향에 상당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1534년 가톨릭 개혁을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는 청빈, 순결,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내걸면서 동시에 수도원의 전통에 문화적 변혁을 시도한 조직이다. 그들은 폐쇄적인 가톨릭 문화를 교육, 선교, 문화, 구제라는 방법으로 적극 개혁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프란치스코 1세도 소위 예수회식 가톨릭 개혁에 나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해방신학 내지는 군부독재 타도와는 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그가 파격적 방식으로 바티칸을 개혁하려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프란치스코 1세의 가장 주된 배경은 남미 출신이란 점이다. 더 정확히는 남미 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배출된 교황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콘클라베의 주도권은 개혁 쪽이 쥐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제 성추문, 비밀 문건 유출 파문 등으로 위신이 떨어진 가톨릭을 조직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내부적 요청에 더해, 이제 흑인 내지는 남미 교황이 탄생할 때도 되었다는 시대적 요청이 한몫했다.
현재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23%만이 유럽인이며 남미는 무려 45%다. 프란치스코 1세를 배출한 아르헨티나는 전국민의 92%가 가톨릭 신자인, 대표적 가톨릭 국가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이 언제까지 교황직을 독식할 수는 없는 상황. 이번에 프란치스코 1세가 선출됨에 따라 주후 731년 시리아 출신의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비유럽권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콘클라베를 직전에 두고 남미 출신 후보보다는 흑인 출신이 주목받았다. 아프리카 가나의 피터 턱슨 추기경이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군에 들었으며 그 자신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언론들도 흑인 교황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 세력이 흑인 세력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개혁에 대한 요구와 남미의 거대한 교세 때문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1세는 남미 출신이며 남미에서 평생을 사역해 온 성직자이지만 그의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인 이민자다. 많은 언론들이 프란치스코 1세가 철도노동자의 아들 출신에서 교황에까지 올랐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혈통적 국적이 100% 이탈리아임은 간과하고 있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115명 중 28명으로 최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455년간 독식해오다 요한 바오로 2세 때부터 35년 동안 놓친 교황직을 다시 찾아 오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의 455년, 유럽의 1282년 교황직 독식이란 수식어로 인해 수구적 이미지로 비친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따라서 콘클라베의 선택은 바로 의외에 인물에게 집중됐다. 바로 프란치스코 1세다.
파격적 개혁을 외칠지도 모르는 흑인 교황보다는 그래도 온건한 개혁적 이미지를 비출 수 있는 남미 출신 교황이다. 게다가 그는 완벽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정도의 혈통상 100% 이탈리아인이기도 하다. 개혁과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프란치스코 1세에 호감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를 비롯한 보수적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은 새로운 교황에 상당한 만족을 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1세가 바티칸의 권위 실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그는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 신학적 이슈에 관해서는 강경보수파로 잘 알려져 있으나 대외적인 입장은 상당히 개혁적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벌써부터 파격적인 모습을 통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가 선택한 즉위명은 프란치스코다. 이는 청빈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가톨릭 성자 프란치스코 수사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교황도 사용한 적이 없다. 실제로 새 교황은 평소 근검 절약하는 삶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큰 저택을 마다하고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버스를 타고 다니고 직접 요리도 한다. 빈민가 활동도 그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프란치스코라는 즉위명을 선택한 것은 전세계의 가난한 빈곤층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교황에 선출된 후에도 여전히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으며 자신을 선출한 추기경들에게 “하느님께서 ‘날 교황에 선출한’ 당신들을 용서하시길 빈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소탈하다.
그가 50년 이상 몸담은 예수회도 이런 성향에 상당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1534년 가톨릭 개혁을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는 청빈, 순결,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내걸면서 동시에 수도원의 전통에 문화적 변혁을 시도한 조직이다. 그들은 폐쇄적인 가톨릭 문화를 교육, 선교, 문화, 구제라는 방법으로 적극 개혁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프란치스코 1세도 소위 예수회식 가톨릭 개혁에 나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해방신학 내지는 군부독재 타도와는 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그가 파격적 방식으로 바티칸을 개혁하려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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