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머리에 동그란 유태식 종이 모자를 얹혀 쓴다.
건물 안 어지럽게 사람들 틈에 섞여
홀, 이 쪽 저 쪽을 드나들다가
빨간 벽의 작은 방에 검은 보를 씌운
커다란 책상 상자 앞에 선다
삼천년 된 다윗의 무덤
순박하게, 목동생활로 수려한 몸을 다듬고 괴력을 길러 맹수와도 겨눠내던,
막내소년이어서, 달이면 달 반씩도 아버지의 안중에서도 벗어나
들판 밖에 밀쳐 내 있다가, 어느 날 불려냄을 받더니
왕의 기름을 머리에 받았던 아이
헐렁한 투구, 장수(將帥)복도 벗어던지고
맨 목동(牧童)옷으로 돌멩이 돌팔매 하나로
구척 敵將 골리앗을 넘어뜨렸던 소년이,
그렇듯 위대했던 다윗이 되더니
더욱 信望 두터운 신앙이 되어
예루살렘에 처음 도읍터를 세우고
당시의 그 쪽 세계를 휘어잡고 만 인물.
사람은 숨겨 숨어진 品格이 닦여, 닦여지면
그 어느 날, 그 위대한 活火山으로 튀어 오르는 理致
유대인으로의 생각을 접어
바로, 신앙의 점철을 거슬러 올라가 서서
밀접한 신앙핏줄로 떠오를 때
그 것은 나의 신앙의 그림자로 나위에 덮여 오는
구름 사이의 햇살 되어, 열리우는 것인데,
생각만 으로라도 巨步를 밟고 싶어
퍼지는 저녁에 노을 되어
생명의 캔버스 위에 나의 그림을 펼쳐 올려, 놓아 본 다
줄기 찬 역사의 꿈을 실현 해 가며
세월의 가닥마다
열매 익혀갔든 진액(津液)을 담아서
어두운 세계에 빛을 뿌려, 무지개를 폈던 세월이라면
꿈과 현실의 峽谷 사이에 끼어
山峽을 넘어가고 있는 遊泳의 自由여_
조용하게 지난 세월을 더듬어 봅니다. 계곡, 산줄기 계곡 같은 세월을 타고 넘고 온 세월을 되새겨 봅니다. 누구랴 더듬어 온 세월이 난협(難峽)이 아니라고, 말 안할 수야 없을 것이겠지만 나름마다의 굴곡들이었음을 빛깔지어 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 斷面 단면마다 하나의 그림 같은 작품으로 펼쳐져서 번듯하게 세상의 名展示會로 내 걸을 수도 있다고 각기 자탄(自歎)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이 지나간 세월 그림자를 어쩌면 3천 년 전쯤의 왕 <다윗>의 생애로 과감하게 오버랩 하여 본다는, 끼도 용감하게 얽혀 보고도 싶습니다... 그리고 글쎄, 여기 다윗 城의 이 안 자리에, 검정 비로도 천 덮은 이 분의 묵직한 상자덩어리로서 올려 놓여져 있습니다. 그 앞에 서서 잠깐 동안 묵상하고 서 있는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현란했던 다윗왕의 한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거대한 자막 위같이 펼쳐져 가고 있습니다. 聖地를 둘러보면 여전히 그분의 숨소리가 이곳저곳에 풍겨 나올 정도로, 현실감으로 우뚝우뚝 字幕으로, 세워져 나타나옵니다. 그런데, 이 자막들이 왜 우리들 자신의 생애의 그림자에 겹쳐지면서, 우리 나 자신은 조금은 초라해진다고 생각되어 오는 걸까요. 되짚어보면 그분의 생애나 우리 각자 자신의 생애라 해도, 한 생애의 숨결은 같은 地上에 발을 딛고서 살아 온 生涯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아직은 무언가 벌릴만한 후레임이 조금은 더, 또 조금은 더 엮어져 갈 수 있을 것이 남겨 있을 것이라고 自覺해 봅니다. 한 사람의 생애의 단 하루 동안 만이라 해도, 우리 모두 하나의 웅크리고 그릴 그림은, 각기의 뛰어가는 그 자리에서, 열의 드려서 그려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직 여유(餘裕)는 남겨져 있습니다. 오늘의 내 작품을 수수롭게 짬짜내어 가는 熱氣를, 다시 일으켜 세워 봅니다.
[軒鏡 최윤환] 다윗의 무덤 앞에 서서
여정크리스찬휄로우십교회 최윤환 목사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