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 역사학자인 하라 마코토 교수(도시샤대 신학부)가 26일 장신대 국제선교학술대회에서 ‘일본교회 선교의 역사와 현황’을 발표했다.
일본의 개신교회는 1872년 주로 미국에서 온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선교사들은 전도와 함께 교육, 사회, 복지활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고, 일본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1%에 불과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가 가진 영향력은 결코 1%가 아니다. 일본 기독교계는 교회가 일본사회 각 방면에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는 것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 특성과 현재 상황을 전했다.
일본의 ‘근대’는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의한 개국으로 시작됐다. 봉건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했었지만, 메이지덴노(일왕)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수용했다. 근대화 속에서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소극적 수용이었다. 주로 舊 도쿠가와측에 있다가 몰락한 젊은 사족들이 서양 학문을 통한 가문의 부활을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들의 기독교 이해는 애국적이며 문화교양주의적이었다. 일본 1세대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과 신학은 ‘두 개의 J’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Japan의 J’로 일본고유 문화에 대한 심취이며, 다른 하나는 ‘Jesus의 J’로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우치무라의 정신은 근대 메이지 시대의 기독교적 과제를 잘 나타낸다. 1세대 기독교인들은 근대일본에서 기독교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전력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대만과 한국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며 ‘황민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기독교의 과제는 일본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방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기독교 입장에서 공헌하고자 ‘조선전도’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은 종교인에게 있는데,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일본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은 일본 종교인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신민’을 만들기 위한 전도였던 것이다.
1937년 총독부는 일장기 게양, 조서봉독, 동방요배, 신사참배, 고신에(덴노와 그 아내의 사진) 예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17세 이상 조선인 남성을 지원에 의해 병적에 편입시키는 제도)를 실시했으며, 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1939년에는 창씨개명, 국민징용령을 내려 위안부를 필두로 강제 연행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하고 있던 총독부가 추진하는 ‘내선기독교일체운동’에 호응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국교회에 일본기독교연맹의 도미타 미쓰루 목사를 파견했다. 도미타 미쓰루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라 하는 이상,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며 일본의 정책을 거드는 말을 했고, 같은 해 조선의 기독교 각파 대표가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하게 됐다.
일본의 패전 직후 연합군은 통제법, 탄압법인 치안유지법, 종교단체법을 폐지하고, 신도지령(국가·신도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및 운영을 폐지하는 정교분리 법령)을 발표했다. 종교단체법의 폐지에 따라 침례교회와 루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서 이탈했지만, 주요교파인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계 교회, 성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 그대로 남아 연합교회로서 오늘까지 이른다.
전쟁 패배 후 군국주의 및 천황신격화의 가치관이 붕괴되자 정신적 공백을 메울 것으로 공산당과 기독교가 주목을 받았다. 교회는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의 쇼윈도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청년들은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국헌법의 제정으로 교회는 ‘제한된 종교의 자유’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 일본 기독교인들 반전운동을 주도했으며, ‘야스쿠니신사국가수호법안’의 폐지를 촉구했다.
현재 일본교회의 신자 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약 106만 명이다. 일본의 가장 큰 연합교회인 일본기독교단의 신자 수는 완만한 감소 추세에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현재 17.8만 명이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도 가맹 교회도 마찬가지 추세다. 다만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가입되어 있는 일본복음동맹(JEA) 소속 교회는 소폭 증가하고 있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기독교는 일본 사회 속에서 역사적 유산으로 정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또 ‘부드러운 천황제’가 현재에도 민족주의적 실제로 존재하며 작동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복음이 현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 선교의 기본적 주제인 ‘사회의 주변, 소수자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개신교회는 1872년 주로 미국에서 온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선교사들은 전도와 함께 교육, 사회, 복지활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고, 일본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1%에 불과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가 가진 영향력은 결코 1%가 아니다. 일본 기독교계는 교회가 일본사회 각 방면에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는 것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 특성과 현재 상황을 전했다.
일본의 ‘근대’는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의한 개국으로 시작됐다. 봉건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했었지만, 메이지덴노(일왕)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수용했다. 근대화 속에서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소극적 수용이었다. 주로 舊 도쿠가와측에 있다가 몰락한 젊은 사족들이 서양 학문을 통한 가문의 부활을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들의 기독교 이해는 애국적이며 문화교양주의적이었다. 일본 1세대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과 신학은 ‘두 개의 J’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Japan의 J’로 일본고유 문화에 대한 심취이며, 다른 하나는 ‘Jesus의 J’로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우치무라의 정신은 근대 메이지 시대의 기독교적 과제를 잘 나타낸다. 1세대 기독교인들은 근대일본에서 기독교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전력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대만과 한국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며 ‘황민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기독교의 과제는 일본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방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기독교 입장에서 공헌하고자 ‘조선전도’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은 종교인에게 있는데,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일본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은 일본 종교인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신민’을 만들기 위한 전도였던 것이다.
1937년 총독부는 일장기 게양, 조서봉독, 동방요배, 신사참배, 고신에(덴노와 그 아내의 사진) 예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17세 이상 조선인 남성을 지원에 의해 병적에 편입시키는 제도)를 실시했으며, 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1939년에는 창씨개명, 국민징용령을 내려 위안부를 필두로 강제 연행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하고 있던 총독부가 추진하는 ‘내선기독교일체운동’에 호응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국교회에 일본기독교연맹의 도미타 미쓰루 목사를 파견했다. 도미타 미쓰루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라 하는 이상,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며 일본의 정책을 거드는 말을 했고, 같은 해 조선의 기독교 각파 대표가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하게 됐다.
일본의 패전 직후 연합군은 통제법, 탄압법인 치안유지법, 종교단체법을 폐지하고, 신도지령(국가·신도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및 운영을 폐지하는 정교분리 법령)을 발표했다. 종교단체법의 폐지에 따라 침례교회와 루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서 이탈했지만, 주요교파인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계 교회, 성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 그대로 남아 연합교회로서 오늘까지 이른다.
전쟁 패배 후 군국주의 및 천황신격화의 가치관이 붕괴되자 정신적 공백을 메울 것으로 공산당과 기독교가 주목을 받았다. 교회는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의 쇼윈도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청년들은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국헌법의 제정으로 교회는 ‘제한된 종교의 자유’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 일본 기독교인들 반전운동을 주도했으며, ‘야스쿠니신사국가수호법안’의 폐지를 촉구했다.
현재 일본교회의 신자 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약 106만 명이다. 일본의 가장 큰 연합교회인 일본기독교단의 신자 수는 완만한 감소 추세에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현재 17.8만 명이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도 가맹 교회도 마찬가지 추세다. 다만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가입되어 있는 일본복음동맹(JEA) 소속 교회는 소폭 증가하고 있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기독교는 일본 사회 속에서 역사적 유산으로 정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또 ‘부드러운 천황제’가 현재에도 민족주의적 실제로 존재하며 작동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복음이 현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 선교의 기본적 주제인 ‘사회의 주변, 소수자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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