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50년 산 속에서 산 남자’가 방영되었다. 제보를 받고 제작진이 산으로 올라갔다. 높은 산에 사람이 산 흔적을 가진 동굴이 있었다. 사람이 억지로 들어갈 수 있는 틈새였다. 안에 들어가니 사람이 움직이기도 불편한 공간이었다. 거기서 사람이 살아온 것이다.

얼마 시간이 지났을까, 제작진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제작진과 만나기를 꺼려했다. 제작진이 끈질기게 접근한 끝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70세 된 할아버지였다. 몰골은 형편없었다. 몸은 바짝 말랐다. 추워서 그런지 몸을 떨고 있었다. 건강 상태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제작진의 노력 끝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아냈다. 동네에 와서 물어보니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50년 전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50년 동안 산 속에서 혼자 산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마다 싸웠다. 아이는 공포에 떨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아이를 보호해 주었다. 부모님이 싸울수록 어린 그는 할머니 품을 더 파고들게 되었다. 10대가 되었을 때 할머니가 죽었다. 그때부터 소년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50년 동안 소나 돼지가 먹는 사료를 식사로 먹으면서 살았다. 사료마저도 먹을 수 없을 때가 허다했다. 더구나 겨울에는 아무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겨우내 잠을 청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제작진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지만, 할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작진은 할아버지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접근 끝에 할아버지의 마음은 조금씩 열렸다. 드디어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왜 산으로 들어왔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무서웠어요.”
“산으로 들어왔을 때 느낌은 어땠어요?”
“재밌고 좋았어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산 속 깊은 곳에서의 생활이 재밌다니?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산 속이 행복했다니? 추위를 이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텐데, 그런데도 좋았다니?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짠~ 했다.

할아버지가 산으로 들어오기 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오락에도 재주를 가질 정도로 쾌활했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과 단절했다.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왜? 싸움만 하는 부모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 상처가 그를 산으로 내몰았다. 삭막한 산을 즐기도록 만들었다. 급기야 할아버지의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산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가오자 자신의 은신처인 동굴로 몸을 숨겼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할아버지는 다시 동네 사람 앞에 몸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왜? 무슨 잘못을 했기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네로 돌아가서 살자.”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권유를 했다. 하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그에게 유일한 보금자리는 몸도 가누기 힘든 산속 좁은 동굴이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제작진은 할아버지를 위해 텐트를 만들어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고구마와 호박과 같은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동네로 내려갈 것을 궈했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방어벽을 점점 허물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 50년 만에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세상으로 나오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겨울만이라도 동네에 가서 살기로 하자.” 그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설득 끝에 할아버지의 마음은 움직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산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어 왔던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 때문에 다시 사람들 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의 위력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느낄 수 없어서 산으로 도망쳤던 10대 소년. 50년이 지난 70대가 되어서야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를 사랑하고 염려해주는 사람들의 사람에 힘입어.

대구의 어느 아파트 화단에 한 젊은이가 엎어져 있었다. 삼수를 하던 젊은이가 수능시험을 하루 앞두고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이다. 과도한 경쟁교육, 입시 스트레스, 성적 지상주의가 또 한명의 젊은 목숨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다. 그는 학원에서 상위권 성적이었다. 서울에 있는 꽤 이름난 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성적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았다. 예비소집에 갔다 오는 길에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한두 번 자살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단 말인가? 왜 복잡하고 힘든 아들의 마음을 돌봐주지 못했단 말인가? 왜 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을까? 대학이 다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만 다해보자고. 꼭 그 대학을 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랬으면 아들을 잃지 않았을 것을. 왜 아들을 절벽으로 내몰았을까?

이런 말을 하면서도 걱정이 앞서기는 한다. 남의 사정과 형편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헤아려 보지도 못하는 욥의 친구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큰딸이 재수를 할 때가 생각난다. 10월쯤 되니 스트레스가 고조가 된 듯하다. 딸에게서 고민이 역력히 보였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말했다. “혜린아, 힘내자. 어떤 결과가 나와도 아빤 괜찮다. 마지막까지 최선만 다하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올해 아들이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수시 입학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아들에게도 갈팡질팡하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 큰딸을 생각하니 아들의 실력으로 대학을 제대로 보낼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생각한 끝에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형규야, 실업계로 진학을 하면 어떻겠니? 두 가지로 보자. 하나는 실업계 전형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을 경우, 취업을 하도록 하자.” 아들도 아빠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아빠가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해서 금융고등학교를 입학했다. 그런데 5-6월쯤 되었을까? 아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아들의 말을 듣고 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지금은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아빠가 계산했을 때는 일반고등학교를 입학하는 것보다 더 승산이 큰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고민하지 말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선택을 하자. 아빠는 네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그렇지 못하면 전문대학을 가도 괜찮아. 아니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해도 좋다고 본다. 취업을 해서 네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그때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우리 교회도 직장 다니다가 좋은 대학을 입학한 선배들이 몇 명 있잖니? 최선만 다하자.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 맡겨두자.”

결국 아들은 고민을 끝냈다. 그리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반에서 여자 아이랑 1, 2등을 다투었다. 부반장, 반장을 하면서 리더십도 발휘했다. 교회에서도 고등부 회장을 2년 연임하면서 고등부를 섬겼다. 정시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수시에 승부를 걸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은혜로, 두 곳이나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합격을 확인 한 후 아들은 즉시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나 합격! 다 아빠 기도 덕분이야^^”

난 다시 아들에게 회신했다. “하나님의 은혜란다. 네가 열심히 달려온 열매이고. 사랑하는 아들 고맙다^^”

천하를 주고도 바꾸지 않을 자식을 품고 염려하는 부모들이여, 우리의 자녀를 어디로 보내고 있는가? 산으로 내몰리는 아들? 자살로 내몰리는 아들? 하나님의 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