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가장 비슷한 존재가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아버지’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극악무도하거나 패악한 아버지, 또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등 ‘부정적인 아버지상’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가 될까?
이 ‘결함 있는 아버지 가설(defective father)’은 무신론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시대’를 연 프로이트에서 시작돼 수많은 심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됐다. ‘신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심리학적 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의 존재 여부’는 심리학적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무신론의 심리학(Faith of the Fatherless)>은 이러한 주장을 반대로 뒤집는다. 저자인 심리학자 폴 비츠는 ‘아버지 부재와 무신론 신앙’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신론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분석했다. 신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무신론자들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이를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신의 존재를 축소하는데 주로 이용됐던 심리학을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증거로 활용한 시도이다.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자신의 지적 삶과 공적 입장의 핵심으로 삼았던 ‘특별히 역사상 유명한 무신론자들’을 선별해 ‘실험 집단(experimental group)’으로 삼았다. 실증적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세계관이 주요 관심사가 아닌 과학자나, 지적인 신념과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을 분리하기 어려운 예술가 등은 무신론자라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논증했던 유신론자들을 ‘통제 집단(control group)’으로 이들과 비교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를 비롯해 데이비드 흄,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등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죽은 아버지 증후군(dead father syndrome)’에 속했고, 토머스 홉스, 볼테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은 ‘유약하고 학대하는 아버지’에 속했다.
아동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에 따르면 아버지 존재가 가장 강력할 때는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전인 3-5세 시절이다. 니체의 아버지가 ‘목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그가 5세도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흄은 두 살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러셀은 네 살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그가 17세 때 자살했다. 20세기 말 저널리스트인 러셀 베이커는 자서전에서 5살 때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왜 아버지를 죽게 하셨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반해 신 존재에 관한 ‘파스칼의 내기’로 유명한 블레즈 파스칼과 윌리엄 페일리, 윌리엄 윌버포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하, 알렉시스 토크빌, 알베르트 슈바이처,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 유신론자들은 어린 시절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버지와 함께한 것이 이들의 자서전과 각종 자료에서 드러났다.
어머니의 존재 유무나 친밀성 정도는 유·무신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행위와 별다른 상관성이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유명한 무신론자들에게는 ‘아버지 부재’ 외에도 또다른 공통점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상당한 수준의 야망과, 여기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지적 오만이다. 저자는 한때 자신이 학문적 야심 때문에 무신론적 심리학자를 ‘선택’했음을 고백하면서, “오만하고 야심적인 지식인들이 아무리 의지적으로 무신론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거기에는 매우 깊고 불안정한 불신앙의 근원적 원인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요한 측면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있다면 아버지 부재에서 오는 문제는 보완될 수 있고, 이런 경우 무신론적 성향은 눈에 띄게 감소하거나 심지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경우의 예외도 한두 명에게는 존재한다.
저자는 “자신을 거절하고 부인하고 미워하고 조종하며, 신체적·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유기한 아버지를 둔 무신론들에 대해서는 이해와 긍휼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이 아버지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거나 심한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분명히 비극적인 일”이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를 돌볼 의무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날이 갈수록 가정이 파편화되고 깨어지는 상황 때문에 ‘무신론자’, 우리가 쓰는 말로는 ‘안티기독교인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도 생긴다.
이 ‘결함 있는 아버지 가설(defective father)’은 무신론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시대’를 연 프로이트에서 시작돼 수많은 심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됐다. ‘신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심리학적 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의 존재 여부’는 심리학적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무신론의 심리학(Faith of the Fatherless)>은 이러한 주장을 반대로 뒤집는다. 저자인 심리학자 폴 비츠는 ‘아버지 부재와 무신론 신앙’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신론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분석했다. 신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무신론자들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이를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신의 존재를 축소하는데 주로 이용됐던 심리학을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증거로 활용한 시도이다.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자신의 지적 삶과 공적 입장의 핵심으로 삼았던 ‘특별히 역사상 유명한 무신론자들’을 선별해 ‘실험 집단(experimental group)’으로 삼았다. 실증적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세계관이 주요 관심사가 아닌 과학자나, 지적인 신념과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을 분리하기 어려운 예술가 등은 무신론자라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논증했던 유신론자들을 ‘통제 집단(control group)’으로 이들과 비교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를 비롯해 데이비드 흄,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등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죽은 아버지 증후군(dead father syndrome)’에 속했고, 토머스 홉스, 볼테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은 ‘유약하고 학대하는 아버지’에 속했다.
아동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에 따르면 아버지 존재가 가장 강력할 때는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전인 3-5세 시절이다. 니체의 아버지가 ‘목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그가 5세도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흄은 두 살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러셀은 네 살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그가 17세 때 자살했다. 20세기 말 저널리스트인 러셀 베이커는 자서전에서 5살 때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왜 아버지를 죽게 하셨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반해 신 존재에 관한 ‘파스칼의 내기’로 유명한 블레즈 파스칼과 윌리엄 페일리, 윌리엄 윌버포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하, 알렉시스 토크빌, 알베르트 슈바이처,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 유신론자들은 어린 시절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버지와 함께한 것이 이들의 자서전과 각종 자료에서 드러났다.
어머니의 존재 유무나 친밀성 정도는 유·무신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행위와 별다른 상관성이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유명한 무신론자들에게는 ‘아버지 부재’ 외에도 또다른 공통점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상당한 수준의 야망과, 여기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지적 오만이다. 저자는 한때 자신이 학문적 야심 때문에 무신론적 심리학자를 ‘선택’했음을 고백하면서, “오만하고 야심적인 지식인들이 아무리 의지적으로 무신론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거기에는 매우 깊고 불안정한 불신앙의 근원적 원인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요한 측면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있다면 아버지 부재에서 오는 문제는 보완될 수 있고, 이런 경우 무신론적 성향은 눈에 띄게 감소하거나 심지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경우의 예외도 한두 명에게는 존재한다.
저자는 “자신을 거절하고 부인하고 미워하고 조종하며, 신체적·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유기한 아버지를 둔 무신론들에 대해서는 이해와 긍휼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이 아버지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거나 심한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분명히 비극적인 일”이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를 돌볼 의무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날이 갈수록 가정이 파편화되고 깨어지는 상황 때문에 ‘무신론자’, 우리가 쓰는 말로는 ‘안티기독교인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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