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수 있습니다. 그 중에 사울의 인생을 통해 몇 가지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눈먼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천국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좇아 열심을 다해 산 결과는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바울 향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역설적으로 사울의 눈을 멀게 해서 비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물든 눈으로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세상눈을 감고 주님만 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또한 혼자의 힘으로는 잘 되지 않으니 바르게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비늘 벗은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 9: 18절에“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은 그때까지 자신의 눈에 비늘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셈이었지만, 사울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받은 시험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멋있게 뛰어내려라. 천하만국 권세를 다 줄 테니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현세주의자로 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처럼 현세에 시선이 고정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두었기에 이 유혹을 말씀으로 이깁니다. 이렇듯 비전의 사람도 주님처럼 비늘 벗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비늘을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벗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을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전의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된 성전을 건축물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참된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portable temple)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움직이는 성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인 내가 내 자신을 성전으로 일구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비양심의 세계에서 양심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지만, 내 자신이 성전 되지 못한 모습으로 목회의 현장에 나간다면 끔찍한 비극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게 해 달라고? 그러나 내 힘대로 될 수 없으니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네 번째는 “비전의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현장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집니다. 바울은 책상에서 비전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비전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닌 것의 소중함입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오늘이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삽니다. 자기 세계의 확장입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이성적 신앙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리 생애에 다 보지는 못하지만 영원 속에서 확인한다는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