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통계에서 ‘역사상 전세계 최고의 부자’에 선정돼 또다시 화제를 모은 존 D. 록펠러는 크리스천들과 일반인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평생 십일조를 드리면서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던 신앙인’과, ‘노동자를 착취하고 석유를 독점해 부(富)를 이룬 악덕 기업인’이 그것이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미래사)>가 다른 ‘기독교 위인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의 약점을 가려놓은 채 포장만을 일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책은 록펠러에게도 우리 모두가, 심지어는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마저 그러했듯 분명 약함과 허물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음을 이야기한다.

약점부터 살펴보자. 사업에 있어 그는 늘 ‘독점’을 추구했다. 이처럼 석유에 관한 한 모든 과정을 맡아 관리하는 ‘제국 건설’이 그의 꿈이었기 때문에, 후세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엔 ‘독점’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기 때문에, 그는 이를 부도덕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업체들의 난립 때문에 가뜩이나 석유 가격의 널뛰기가 너무나 극심한 상황에서 ‘제살 깎기 경쟁’을 하며 혼란을 지속하기보다, 업체간 협력과 인수·합병으로 시장을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이러한 ‘생소하고 잔인한’ 그의 사업방식 때문에 ‘독점’이라는 개념에 제재가 시작된 것이다.

소위 ‘러들로 학살사건’도 그가 악덕 기업가 이미지를 갖게 된 대표적인 일이다. ‘석유 제국’ 스탠더드 오일은 노조에 대해 강력한 대처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에 반발한 지역 노동자들이 광산노동자연합을 조직하고 동반파업을 준비했다. 이에 스탠더드 오일이 사들였던 콜로라도 연료철강은 연방정부와 함께 맞서다 서로 총격전이 발생해 사상자가 생겼다. 이때 록펠러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록펠러 2세가 회사를 맡고 있었지만, 비난의 화살은 ‘스탠더드 오일’을 상징하는 록펠러에게 향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부분보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그의 신앙적인 면에 더욱 눈길이 간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 난봉꾼 아버지와 신실한 어머니 아래 성장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훨씬 많았고, ‘두집 살림’을 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그래서 그는 거의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전문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사업가적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가정적·신앙적이고 근검·성실·절약하는 모습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들 이야기한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 늘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듯, 신앙인 록펠러를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 엘리자였다. 자녀들의 인격 교육을 위해서라면 눈물을 머금고서라도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다. 어머니는 2층 침실에서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매일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록펠러는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며 착실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유명한 ‘열 가지 가르침’을 남겼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라.
4. 누구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5. 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거라.
6. 아침에는 항상 그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라.
7. 잠들기 전에도 항상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드려라.
8. 남을 도울 수 있는 만큼 힘껏 도와라.
9. 주일예배는 꼭 본 교회에 가서 드려라.
10. 아침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라.

특히 평생 록펠러가 십일조를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적은 돈일지라도 수입이 생길 때마다 한쪽 주머니에 십일조를 따로 떼어놓으라고 늘 가르쳤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록펠러는 후일 “제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혼자 저를 교회로 보내시면서도 용돈으로 주신 20센트 중 10분의 1인 2센트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어머니에게서 받은 이러한 신앙의 유산들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오일 러시(Oil Rush)’라는 시대를 잘 타고나기도 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타고난 성실과 정직성으로 말단 사원에서 세계 최대의 기업가로 한 단계씩 발전해 나갔다. 그는 처음 회계장부 일을 맡았을 때, 자신의 생활태도와 재정상태도 함께 기록했다. 수입과 지출은 물론, 사업자금과 자선사업 내역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늘 어느 싸구려 옷가게에서 옷을 사 입었지만, 살 수 없는 비싼 옷들보다 훨씬 더 질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록펠러는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절약 정신을 전해주는 등 자녀들을 ‘평범하고 신앙적으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자녀들은 용돈을 받으려면 청소를 하거나 파리를 잡는 등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록펠러의 자녀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록펠러와 자녀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고,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 록펠러의 자선사업을 이어받았다.

록펠러는 시카고대학을 세워 많은 학생들을 길러냈고, 의학연구소를 세워 각종 전염병과 폐렴, 소아마비와 매독 등을 치료할 백신을 개발해 인류의 번영에 공헌했다. 급기야는 이 모두를 통합해 ‘록펠러 재단’을 세우고 전세계 가난한 이웃을 돕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 뉴욕의 명소인 ‘록펠러 센터’는 1930년대 대공황을 맞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시작된 건축물이었다.

록펠러는 이미 100년 전, 최근에야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따뜻한 시장경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회공헌이 일각의 비난처럼 시장 독점으로 인한 비난 회피용이나 상속세 무마용이었는지는 그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이후 100년에 걸쳐 수많은 기업가나 부유한 자들이 록펠러처럼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거나 뜻있게 사용하는 일을 명예롭거나 당연하 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됐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재산 때문에 십일조 액수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는 이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확한 계산을 위해 40명을 일꾼으로 동원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십일조는 없다’며 논쟁이 한창이지만, 기복주의가 목적이 아닌 ‘헌신의 표시’로 기쁘게 드리는 십일조라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