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는 모두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십니다.”
12일 버지니아한미장애인협회(회장 수잔 오)에 초청된 연사 스티븐 스털링 씨(차일드펀드 수석부사장)의 메시지는 오히려 전도자에 가까웠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를 대상으로 개최된 이날 세미나에는 약 4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메우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미나 강사로 스털링 씨가 초대된 것은 소아마비가 있음에도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적 삶을 가꾼 그의 삶을 소개함으로, 장애아를 둔 부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5살 때 고아원으로 보내져 10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스털링 씨는 소아마비의 어려움을 딛고 코넬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 여러 대기업체 중역으로 일했다.
하지만 현재 자선단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약 10여년 전, 한국 고아원 시절 친구와의 재회 후였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송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뇌성마비라서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친구였습니다.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니 ‘기억한다’고 했죠. ‘내 어떤 모습을 기억하냐’니까 ‘너가 나를 많이 때렸다’고 하더라고요. 놀란 저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난 이미 오래 전에 널 용서했다’고 하더군요.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 친구에게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어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미국으로 보내신 데에도 목적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대기업 중역으로 일하고 있던 그였지만 이후 높은 연봉을 포기한 채 월드비전으로 자리를 옮겨 전세계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차일드 펀드라는 자선단체의 수석 부사장으로 전세계 장애 어린이들을 돕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차일드 펀드는 미국 지역 연예산이 2억5천만불, 전세계 연예산은 약 6억불에 달하는 세계적 자선단체다.
울다 지쳐 잠들던 시절
스티븐 스털링 씨의 고아원 생활은 5살 때 시작됐다. 첫째 아들이던 그가 소아마비가 걸리자 아버지는 여동생과 함께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몸이 멀쩡한 아이들은 다리가 불편한 그를 때리기 일쑤였고 그런 분노를 그는 자신보다 더 몸이 불편한 이들을 때리며 풀곤 했다.
가족의 품이 그리워 울다가 지쳐 잠드는 건 일상이었고, 고아원 생활이 메마르고 척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해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그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다만 하나님께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며 원망도 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털어놓으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의지할 분은 오직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뿐이었다.
미국 생활, 기회의 땅
10살이 되던 해, 그는 여동생과 함께 알래스카의 한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다. 이후 한국에서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려 애썼다는 그. 그래서인지 10살까지 살았던 한국이지만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장애를 가졌지만 비장애인처럼 정상적 삶을 사는 성공의 본을 보여주고 싶어 지독히도 달려오던 젊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란듯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중역으로 일하며 아름다운 아내도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다.
가족, 그 뜨거운 이름
그가 처음으로 친 부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첫 아이를 낳고 나서다.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되고, 자식을 포기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친부모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를 통해 수소문한 결과 3일 만에 친부모의 집을 알아냈다. 아내와 함께 찾아간 집에서 그는 친 어머니와 누나 2명 그리고 남동생과 재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저와 여동생을 고아원에 보냈었다는 것을 다시 어머니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며 “어머니의 감정이 많이 복받치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그를 고아원에 보낸 후 아버지는 죄책감에 평생 남동생에게 사랑 표현 한번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었다.
회개, 증거자가 되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것이 변했다. 친 가족을 찾았을 뿐 아니라 불교에 심취했던 아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또한 심방나온 목사님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994년 남성들을 위한 컨퍼런스인 ‘프라미스 키퍼’ 행사에 갔을 때, 그는 설교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당시 설교하던 목사님이 ‘우리의 가장 큰 죄는 자만심’이라고 했어요. 모든 것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 속에서 저는 내 자신이 모든 것을 이뤘다고만 생각해왔었는데, ‘너가 내 영광을 빼앗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그 순간, 자신이 예수님도 모르던 시절 하나님께 기도했던 제목들이 모두 신실하게 응답됐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아내와 자신이 이룬 성공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후 스털링 씨는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전도했고, 심지어 사우나에서도 예수님을 전하고 영접 기도를 해주는 에피소드가 벌어지기도 하는 등 끊임없는 증거자로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의 죄인지 아니면 그 조상의 죄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셨어요(요한복음 9장).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한다’라는 확정이 아닌 ‘~할 수도 있다’는 뜻의 ‘Might’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왜 나에게 소아마비가 있었는가? 예전에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라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내 장애를 사용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며 모두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일 버지니아한미장애인협회(회장 수잔 오)에 초청된 연사 스티븐 스털링 씨(차일드펀드 수석부사장)의 메시지는 오히려 전도자에 가까웠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를 대상으로 개최된 이날 세미나에는 약 4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메우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미나 강사로 스털링 씨가 초대된 것은 소아마비가 있음에도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적 삶을 가꾼 그의 삶을 소개함으로, 장애아를 둔 부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5살 때 고아원으로 보내져 10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스털링 씨는 소아마비의 어려움을 딛고 코넬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 여러 대기업체 중역으로 일했다.
하지만 현재 자선단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약 10여년 전, 한국 고아원 시절 친구와의 재회 후였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송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뇌성마비라서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친구였습니다.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니 ‘기억한다’고 했죠. ‘내 어떤 모습을 기억하냐’니까 ‘너가 나를 많이 때렸다’고 하더라고요. 놀란 저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난 이미 오래 전에 널 용서했다’고 하더군요.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 친구에게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어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미국으로 보내신 데에도 목적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대기업 중역으로 일하고 있던 그였지만 이후 높은 연봉을 포기한 채 월드비전으로 자리를 옮겨 전세계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차일드 펀드라는 자선단체의 수석 부사장으로 전세계 장애 어린이들을 돕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차일드 펀드는 미국 지역 연예산이 2억5천만불, 전세계 연예산은 약 6억불에 달하는 세계적 자선단체다.
▲스티븐 스털링 씨 | |
스티븐 스털링 씨의 고아원 생활은 5살 때 시작됐다. 첫째 아들이던 그가 소아마비가 걸리자 아버지는 여동생과 함께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몸이 멀쩡한 아이들은 다리가 불편한 그를 때리기 일쑤였고 그런 분노를 그는 자신보다 더 몸이 불편한 이들을 때리며 풀곤 했다.
가족의 품이 그리워 울다가 지쳐 잠드는 건 일상이었고, 고아원 생활이 메마르고 척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해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그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다만 하나님께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며 원망도 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털어놓으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의지할 분은 오직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뿐이었다.
미국 생활, 기회의 땅
10살이 되던 해, 그는 여동생과 함께 알래스카의 한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다. 이후 한국에서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려 애썼다는 그. 그래서인지 10살까지 살았던 한국이지만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장애를 가졌지만 비장애인처럼 정상적 삶을 사는 성공의 본을 보여주고 싶어 지독히도 달려오던 젊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란듯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중역으로 일하며 아름다운 아내도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다.
가족, 그 뜨거운 이름
그가 처음으로 친 부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첫 아이를 낳고 나서다.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되고, 자식을 포기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친부모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를 통해 수소문한 결과 3일 만에 친부모의 집을 알아냈다. 아내와 함께 찾아간 집에서 그는 친 어머니와 누나 2명 그리고 남동생과 재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저와 여동생을 고아원에 보냈었다는 것을 다시 어머니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며 “어머니의 감정이 많이 복받치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그를 고아원에 보낸 후 아버지는 죄책감에 평생 남동생에게 사랑 표현 한번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었다.
회개, 증거자가 되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것이 변했다. 친 가족을 찾았을 뿐 아니라 불교에 심취했던 아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또한 심방나온 목사님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994년 남성들을 위한 컨퍼런스인 ‘프라미스 키퍼’ 행사에 갔을 때, 그는 설교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당시 설교하던 목사님이 ‘우리의 가장 큰 죄는 자만심’이라고 했어요. 모든 것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 속에서 저는 내 자신이 모든 것을 이뤘다고만 생각해왔었는데, ‘너가 내 영광을 빼앗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그 순간, 자신이 예수님도 모르던 시절 하나님께 기도했던 제목들이 모두 신실하게 응답됐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아내와 자신이 이룬 성공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후 스털링 씨는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전도했고, 심지어 사우나에서도 예수님을 전하고 영접 기도를 해주는 에피소드가 벌어지기도 하는 등 끊임없는 증거자로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의 죄인지 아니면 그 조상의 죄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셨어요(요한복음 9장).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한다’라는 확정이 아닌 ‘~할 수도 있다’는 뜻의 ‘Might’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왜 나에게 소아마비가 있었는가? 예전에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라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내 장애를 사용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며 모두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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