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하나님앞에서
거부할수없는 성실함속에
계절따라 피고지는 꽃과 나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의 정체성이
무엇을 하든지 중요한것 같다

우리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행한바 숨길수없는 삶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채
부패되어가는 영혼들
육신의 안목과 정욕을 위하여

분별되지않는 선과악
부끄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영성

주님을 경외 하는자
부끄럽지 않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

차영운 시인(와싱톤중앙장로교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실하고 신실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간절히 바라고 추구하는 목표일 것이다. 꽃과 나무가 계절에 따라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과 섭리에 합당하게 성실한 생명유지를 이행해 나아 가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1장31절) 하신 바와 같이 창조된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지, 바로 창조질서의 온전함을 뜻하고 있다.

온전한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유지하는 자연의 생명이 믿음의 성실을 드러낸다고 할 것같으면, 인간의 믿음생활도 자연의 생명유지와 같이 창조질서에 따라가는 신실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된 인간의 모습에는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창세기1장28절)이 임재하고 있는 것이 ‘신실한 믿음의 정체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 인격속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동반하고 있고, 바로 그 자유의지가 인간을 타락케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같이 되기”를 (창세기3장5절) 바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창세기3장6절) 자유선택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하는 (이사야5장20절) 혼돈의 세상을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영성’이 나를 포함해서 주위에 널려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간창조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은 타락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사람들에게 주어 인간창조를 하셨을까?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아디아서5장13절) 고 하신 것이 아닐까?

그러한 지혜를 얻는 유일한 길은 ‘주님(여호와)을 경외하는 것’일 것이다. (잠언9장10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러한 지혜를 얻어 신실한 믿음을 간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날마다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