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다보면 와스프(WASP)란 말을 가끔 듣게 된다. WASP는 White Anglo Saxon Protestant라는 말의 첫 스펠을 모아 만든 용어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도”라 할 수 있다. 와스프는 미국의 주류를 의미한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피부색은 백색, 종족은 앵글로 색슨, 종교는 개신교이다. 이 세 가지를 갖춘 사람들이 미국의 핵심 세력이고, 이들이 오늘 미국을 움직이고 또한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물론 세월이 가면, 와스프가 중심에서 변두리로 몰려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분간은 와스프가 이 세상을 움직일 것이다.

백인도 많고, 종교도 다양한데 왜 하필 앵글로색슨족이냐 하는 의문이 든다. 구라파의 많은 종족 중 앵글로 색슨이 어떻게 세계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느냐 하는 점은 흥미롭다. 본디 앵글스와 색슨 족은 인종적으로는 북방계(北方系)에 속하여 장신(長身), 백색, 금발, 벽안(碧眼)에다 좁고 높은 코 등의 육체적 특징이 있으나 민족적으로는 인도 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 게르만(튜턴)족의 한 파이다. 이들은 5세기 경, 본래 픽트족, 스코트족 등 북방계 켈트인이 살고 있던 영국을 침략하여 이들을 일기가 나쁘고 농사에 부적합한 북쪽으로 몰아내고 남부의 온화하고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영국의 주인으로 정착하였다.

이들 야만족들이 개화하는 데는 기독교 선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교회사에서 중세기가 시작된 기점이라 여기는 교황 그레고리 I세가 어거스틴(신학자 어거스틴과 동명이인)을 영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영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레고리가 아직 수도사로 있을 때, 한번은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매물로 나온 훌륭하고 잘생긴 노예들을 보고, 무슨 종족이냐고 물었더니 앵글스(Angles)라고 대답하자, 너희들은 Angles가 아니고, Angels(천사)라고 말했다. 그레고리는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종족이 복음을 모르는 야만 노예로 팔리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자신이 이들에게 전도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선교사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어거스틴을 영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어거스틴 일행은 영국에 건너가 당시 앵글스 왕 에텔베르그를 만나 전도하고 캔터버리에 거주를 허락받고, 거기 성당과 수도원을 짓고 영국 선교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앵글로 색슨 족의 교화는 왕과 왕실의 협력으로 급속히 확장되어 급기야 전 영국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어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교회(종교)개혁의 여파로, 당시 왕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교회(성공회)를 확립한다. 그 후 영국교회를 강요하는 영국을 떠나 청교도들이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해 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 “대영제국은 5대양, 6대주에 해 지는 날이 없다.”고 할 만큼 막강한 국력으로 세계를 제패한다. 아시아의 인도는 물론 북미의 캐나다, 미국, 멀리 대양주의 호주, 뉴질랜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대영제국의 영토였다. 오늘은 이들 모든 나라들이 독립국이 되었지만, 미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들이 영연방(Commonwealth)으로 남아 있다. 영국을 비롯한 앵글로 색슨 족들인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들이다.

우리나라와 교회는 이들 앵글로 색슨 족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먼저 우리 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가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었고, 또한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가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어 선교가 시작되었다.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도, 성결교회도 기타 많은 교파들이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국에 와서 선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농업과 산업, 출판, 체육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회와 민족에 끼친 영향은 여기서 다 거론할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여기 있는 것은 앵글로 색슨 족들의 공헌을 빼고는 논할 수 없다.

국가적으로도 간접적으로는 일제 35년 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고,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해방 후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연유이다. 북한에 공산 러시아군이 진주하여 이북이 공산화되었고, 자유도 먹거리도 없는 흑암의 세상이 된 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6.25 사변이 터졌을 때, 유엔에서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케 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앵글로 색슨 나라들이 참전하여 목숨을 버려 우리를 지켜 주었다. 더 나아가 6.25에 참전한 16개국 군인들의 모든 전비를 미국이 단독으로 담당했다. 미군의 사망, 부상, 포로가 14만 명 이상이었고, 기타 영연방 군인들의 참전, 전사, 부상, 포로를 합하면 10만 명에 이른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 앵글로 색슨 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공산치하에 들어가 북한과 같은 형편이 되었을 것이다.

앵글로 색슨 족이 세계 선교사 절반을 파송하고 있고, 모든 선교비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나님께서는 앵글로 색슨족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과 세계 복음화를 섭리하셨다. 그 일환으로 한민족도 복음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또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다. 우리 민족과 교회는 이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한다. 그리고 이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이들이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주고, 어둠 속에 살고 있을 때 복음의 광명한 빛을 전해 준 것 같이, 우리 보다 어렵게 사는 이웃을 돕고, 아직도 흑암에 살고 있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앵글로 색슨족에 진 빚을 갚는 길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