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두번째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강도는 강도의 생활을 하다가 이제 죽음 직전에 예수님과 낙원에 가는 영광을 얻었다. 그 동안 이 강도의 구원에 대한 평가는 값싼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천국에서 면류관이 아닌 개털 모자를 썼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흉악한 죄를 다 행하고 마지막 순간에 재수 좋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값싼 구원을 받은 것일까?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이신 용서의 기도를 통하여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이 가시는 낙원에 함께 간 첫번째의 사람이 된다.

암호 해독 포인트

이 말씀의 암호의 해독 포인트는 우선 주변을 살핌을 통해서 나온다. 이 말씀은 강도의 요청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하여는 두 강도들이 기대한 기적과 그들이 예상치 못한 우주 최대의 기적, 그리고 한 강도의 간구와 한 강도의 존재의 완성, 두 강도와 두 운명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아담의 후예, 십자가의 후예의 모습, 마지막으로 이사야 53의 완성으로써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

두 강도들이 기대한 기적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 강도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그들이 단순 강도는 아닌 이유는, 십자가형은 비로마 시민 중에서도 반역죄, 혹은 악질범 등의 흉악범에게 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와 한패였을지도 모른다.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살인을 한 자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마가복음 15:7; 누가복음 23:19).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한 것은 그가 무력으로 반로마적 민란을 일으킨 사람으로 예수님과는 정반대쪽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혼돈스러운 영적 혁명을 일으킨 예수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 혁명으로 로마에 반기를 든 바라바가 더 절실했을 수 있다. 어쩌면 두 강도는 그런 바라바와 한패였을 수 있다.

두 강도들도 처음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는다는 것에 최소한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죽는 마당에 여기저기에서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이나 기대들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정황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기적을 행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였는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지나는 자들이 먼저 말하고 대제사장들이 또한 말하여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마가 복음 15: 31-32). 마가복음에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라는 복수형을 씀으로써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욕한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반면 누가복음의 기록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서서 구경하던 자들과 관원과 군인들이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누가복음 23:37) 하였다. 그런 다음 두 행악자 중 한 사람이 다른 행악자를 꾸짖는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도 처음에는 기적을 바랐을 터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이 신음하고 저주하고 육체의 고통에 몸부림 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육체가 찢기는 고통 속에서 깨달았다.

한 강도의 간구

행악자는 그런 예수님의 옆에서 지대한 감동을 받는다. 자신들은 당연히 십자가형을 받지만 예수님의 하신 일은 옳지 않은 일이 없다 말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정돈하고 있다. 이제 겸손하고 절실한 양심을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간구한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의 기대는 낙원의 약속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몇 갑절 영원하고 온전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강도는 나를 “생각”만 해 달라고,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예수님의 약속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기 때문이다. 나중도 아니고 오늘이고, 생각만이 아니라 함께 낙원에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온전한 것으로 채워주신다.

우주 최대의 기적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무런 기적을 행치 않으셨는가? 십자가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기적이 일어난다. 첫번째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런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무기력하게 죽으신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안다면 이 상황은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피조물로 태어나신 것은 더 큰 기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적은 영원하신 초능력을 가진 하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다. 작은 기적 하나면 당연히 십자가를 훌훌 털고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우주 최대의 기적이었다. 신의 죽음, 그 기적은 후에 모든 인류를 살리는 실로 위대한 우주적 기적으로 연결이 된다.

한 강도의 존재의 완성

두번째 기적은 강도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적적인 변화이다. 이미 살폈지만 죽어가는 순간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의 주됨을 고백한다. 강도가 빌라도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러나 함께 죽어가는 예수님께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의 변화의 깊이를 말해준다. 강도의 고백은 절대로 값싼 고백이 아니었고 그가 받은 구원은 절대로 값싼 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깨달음의 깊이와 예수님께 대한 경외의 깊이는 제자들의 행적과 비교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제자들은 지난 삼 년 반 동안 예수의 최측근에서 예수의 행적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요한 외에 다른 이들은 없었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하여 혼돈하고 당황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다. 그러나 삼 년 넘게 따른 제자들이 버린 예수님의 진실을 행악자는 몇 시간의 동반 속에서 알았다.

단지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이고 위대한 가르침을 받거나, 기적을 본 것도 아니고, 심각한 대화를 해본 것도 아닌데 그 행악자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존재의 가장 고귀한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믿음과 회개의 능력이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옆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예수님과의 차이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예수님께 의존한다. 자신의 의지를 버린 것이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의 목적지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믿음의 신비가 때로 의외의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마태복음 8:5-13절의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병든 자신의 부하가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0) 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라는 말씀에는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자들 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로마의 백부장과 같은 의외의 사람이 이 행악자인 것이다. 제자들 보다 믿음이 나은 백부장, 그리고 행악자에게 매우 깊은 기쁨을 표시하신다. 그것은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표현된다. 내가 진실로라는 말은 내용적으로는 확실하게라는 말이지만, 내용적으로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진실을 담았다는 말이다. 결론은 진실로 백부장의 부하는 말씀 만으로 병 고침을 받았고, 진실로 행악자는 낙원에 예수님과 함께 취함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