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원하지 않는 자리에 서야 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삶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알고도 있고, 이해는 해도 늘 그런 자리는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예전에 전도사일 때, 교역자들이 의대의 해부학 시간을 참관하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의 속을 별로 보고 싶지 않고, 또 막연한 선입견으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약속과 일을 그날 만들어서 해부학참관을 피했습니다. 다녀오신 목사님들의 이야기와 느낌, 은혜들을 들으면서도 저는 안가기를 잘 했고, 너는 참 똑똑하다고 자찬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선교지에서 돌아와서 다시 한국에 정착하느라 정신없는 어느 날, 교회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봉고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몇 분의 목사님이 계셨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봉고에 탔는데, 금방 강변북로로 진입해서 달렸습니다. 그래서 인솔하시는 목사님에게 “지금, 우리가 어디를 가느냐고?” 묻으니까 그냥 가면 안다고 하시는데, 분위기가 저만 모르는 것 같아서, 다른 분에게 물으니까 해부학참관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도저히 시간상, 거리상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병원에 들어가게 됐고 해부학참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참관한 분들에 대해서 특별히 더 오래, 더 많이 보게 해달라는 하 목사님의 부탁이 있었다는 원장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때는 머리에서 쥐가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잔머리 굴리지 말고 전도사 때 순종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부터, 왜 미리 안 말해줬나 하는 원망에서, 그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지, 내가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하리요, 하는 고백까지 많은 감정의 교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부를 하는 학생들과 대화도 하고, 설명도 들으면서 몰랐던 많은 것을 생각으로가 아닌 눈과 손,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목회자로서 해부학 시간을 참관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의대생이나 특별한 직업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은혜인데, 제가 감사하고, 겸손하기 보다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만 하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훨씬 깊고, 높은 많은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필립 얀시가 쓴 “기도”(청림출판)라는 책에 보면 중국에서 교회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3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지냈던 한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목사님은 매일 겉옷 한 장만 걸치고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단 한 번도 감기나 독감에 걸린 일이 없다는 간증을 하는데, 저자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면서 정작 그 감옥에서 풀어주시기를 간청하는 무수한 성도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응답을 받든 말든,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모두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지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영국 작가 존 베일리는 “오 하나님, 저를 가르치소서, 오늘 제 삶의 모든 환경을 사용하셔서 죄가 아니라 경건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에서 이런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나, 시험이나, 고통의 한 가운데 있습니까? 힘들고 좌절되십니까? 신실한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우리를 이름으로 기억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