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辛卯)년 정월이다. 정월은 영어로 January이다. January는 라틴어 야누스(janus)에서 연원한 단어로 문(門:door)이란 의미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 오는 해로 들어 가는 입구란 뜻이다. 그런데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양면신(兩面神), 즉 두 얼굴을 가진 신이다. 보통 동물은 얼굴이 앞쪽에 하나 있지만, 야누스는 앞 뒤 양쪽에 얼굴이 있어서 앞도 볼 수 있고, 뒤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January가 야누스에서 나온 것은 정월은 지난해를 볼 수도 있고, 또 새로 오는 해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쪽에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편리한 면이 있을 것이다. “뒤통수를 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누군가가 몰래 뒤에 와서 뒷머리를 친다는 말이다. 뒤에 눈이 없기 때문에 조용히 접근하는 사람을 볼 수 없어서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뒤에 눈이 있다면 뒤통수를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면의 동물은 무척 편리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얼굴이 양쪽에 있으면 불편한 면도 있을 것 같다. 쉽게 생각해서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서는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뒤쪽에 얼굴이 있으니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생을 모로 자는 운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앞쪽에만 얼굴을 갖게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나간 과거는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 역사는 살펴볼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명한 역사학자 카(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정의 했다. 즉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는 말이다. 역사가 없는 개인, 가정,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의 교훈”이란 말은 역사가 보여 주는 훈계를 저버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역사를 반추하면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어 사는 사람이 많다. 과거에 저지를 죄악 때문에 고민하고, 좌절하고, 낙담한 나머지 우울증, 불면증, 노이로제에 이어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선택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과거가 현재의 삶은 망가뜨리는 현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 이 말씀은 역사를 지워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자신을 망가뜨릴 수 있는 과거를 지우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에 얽매어 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고 정결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 하셨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우리에게는 과거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제 자유를 만끽하는 일만 남아 있다.

야누스는 양면신이므로 두 얼굴을 갖고 있어서 양면성을 지닌다. 모든 사물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양면이 있다. 인간에게도 양면이 있다. 흔히 하는 말 중,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이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뜻은 인간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두 얼굴을 갖고 산다. 가족들에게 보이는 얼굴, 남들에게 보이는 얼굴, 이해관계가 없을 때의 얼굴과 있을 때의 얼굴이 다른 양면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낮에는 선량하고 친절하고 자상한 의사로 일한 지킬 박사와, 밤만 되면 살인마로 변하는 하이드씨의 이중적 인간을 조명한 작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선을 지향하려는 성령님과 악을 도모하고 실천하려는 악마의 영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어느 영에 의해 살아가느냐에 따라 지킬도 되고, 하이드도 된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 있느냐?”(약 3:11)고 한 말씀과 같이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의 입에서는 단물과 쓴물이 스스럼없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양면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성경은 일관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주일만 신자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불신자로 살아가는 이중적 신앙생활의 모습을 지탄하는 소리는 신자들의 이중적 삶을 조롱하는 말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갖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한 얼굴만 갖고 살아야 한다. 육신의 얼굴만 하나여서는 안 된고, 내면도 하나의 얼굴이어야 한다. 한 입에서 진실과 거짓, 두 말이 나오면 안 된다. 한자 경구에 “일구이언(一口二言) 이부지자(二父之子)”라는 말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자는 애비가 둘”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한 입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살라는 경구이다.

토끼는 다산(多産)과 평화의 상징이라 한다. 금년 한 해는 모든 면에서 풍요롭게 그리고 평화가 깃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요와 평화는 진실에 있는 곳에 오게 되어 있다. 거짓과 사기와 이중인격과 외식이 판을 치는 곳에 어떻게 이런 덕목이 공존할 수 있겠는가. 바라기는 금년에 모두 양면이 아닌 일면의 인격과 신앙으로 당면한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풍요와 평화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교회와 민족, 그리고 온 인류에 깃드는 한 해가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2011. 정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