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의식이 생기기도 전에 기독교인이 되어버린 자신(기독교 가정)의 삶이 부끄러움뿐이었기에, 이 책의 글과 그림을 통해 부끄러움을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그림과 글에 대한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책을 엮었다고 하는 고백에 저는 두 가지 이유로 마음이 끌렸습니다. 하나는 제가 학창시절 미술을 참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어떻게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있었고, 두 번째는, 한 두 장만 읽어도 단순한 그림에 대한 설명문이 아니라, 짧지만 매우 깊은 영적 사색(思索)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정말 문학상, 미술상을 모두 수상한 분이 쓴 글이구나!’라는 강한 느낌이 저에게 왔습니다.

저자는 1장에서 ‘하나님이 그리신 아름다운 세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흔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터키, 쿠바, 멕시코, 이란,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네팔, 키르기스스탄 등 자연의 모습이 좀 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국가의 바다, 땅, 가정 등을 한지, 먹, 물감, 닥판,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생명을 훼손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은 너그럽다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이 생태계의 깡패를 위해 변함없이 열매를 맺게 하고 뿌리를 내리게 하며 사랑의 마음을 보내는 자연에 대한 감사가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2장에서는 ‘내가 그린 당신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는데, 저는 하나하나의 그림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뭉클해졌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있다. 눈물이 있다. 달콤함과 짜릿함보다 아픔과 눈물이 먼저다. 아픔과 눈물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랑의 깊이도 더해진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이다. 바보 예수!’ 그리고 붉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약간은 형이상학적인 예수님의 얼굴이 화선지에 그려져 있습니다. 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들의 피에 그 어머니의 옷이 흥건히 젖다. 어머니의 눈물이 아들의 몸을 적시다. 오오- 참으로 오랜만에 안아보는 아들이여. 그 어미의 품에 안긴 아들이여. 이 순간만은 여인의 아들이었던 나사렛 예수. 죽어서야 육신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신의 아들.’ 그리고 피투성이인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눈물이 먹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3장은 ‘당신과 함께이기에 나 평강 누리리라’는 주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존적인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으로 다가온 예수님과의 따스한 기억에 대해 글과 그림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4장의 주제는 ‘당신이 빚으신 사랑의 선물’인데, 가난했던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잔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글을 하나만 더 기록하겠습니다. ‘우는 신(神)의 이야기를 전에 나는 신화 속에서라도 본 적이 없다. 세상의 신은 울지 않는다. 오직 군림하고 호령할 뿐이다. 채찍을 들고 징벌할 뿐이다. 신은 스스로도 울지 않고 우는 자를 잡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우셨다. 그 신은 달랐다. 당신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주림과 아픔 때문에 우셨다. 스스로 울었을 뿐 아니라 우는 자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들을 일으켰고, 그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당신이 우심으로 우리가 웃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신과 그이가 다른 점이다. 한없이 낮고 끝없이 온유하셨던 분. 허리를 낮춰 병든 자의 이마에 입 맞추고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던 분. 그 신의 아들이자 스스로 신이었던 분이, 그 분이 우셨다.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아픔 때문에. 당신의 눈물로 우리의 웃음을 사셨던 것이다.’

저는 이 단락을 읽으며 그 분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든, 영적인 병이든 그분은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분이기에, 기꺼이 내 병도 고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내 얼굴에 웃음이 넘치기를 바라며 당신은 눈물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는 그 분! “당신은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