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뉴델리를 중심으로 약 4억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북인도 지역 6개 도에서 교회와 신학교 사역을 하고 있는 비제 크마르 씽(Rev. V.K. Singh) 목사 부부를 지난 19일(토) 인터뷰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이명희 사모는 한국인으로 1976년 한국 장로회신학대학(광나루)에 유학 온 씽 목사를 만나 결혼 한 이후 지금까지 험난한 인도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하나님께 가장 공부도 많이 하고, 잘 생기고, 집안도 좋은 사람을 배우자로 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연히 한국 사람일 줄 알았지 인도사람이라고 생각했겠어요? 씽 목사를 만나고 과연 이 사람이 배우자인지 금식기도하면서 응답을 구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으셔서 포기한 마지막 날 새벽, 기도 중에 보여주신 환상에서 하얀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황량한 인도 선교지에 서 있는 뒷모습을 봤어요. 뒤를 돌아보는데 바로 저의 모습이더라고요.”(이 사모)

26살에 예수를 믿고 가슴이 뜨거워진 그녀는 무작정 신학대를 다니겠다고 잘 다니던 직장도, 원만했던 가족관계도, 꿈꿔왔던 미래도 내려놨다. 불교를 믿던 집에서는 결사 반대하고 나섰고, 모든 지원을 일절 끊어 어려움 속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 정확한 시간표대로 씽 목사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씽 목사 가정은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감리교회 장로로 섬겼고, 씽 목사 역시 독실한 신앙 안에서 자라나 10대 시절 목회자가 되기를 서원했다. ‘세계적인 목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격려에 미국 신학대에서 공부하고자 소속 감독에게 추천서를 써 달라고 부탁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고향에서 큰 교회를 하던 목회자들이 공부한다고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씽 목사 역시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장장 8년을 공부하고 목회하면서 미국 신학대에 들어가기를 기다렸지만 응답은 의외의 곳에서 왔다.

“싱가폴 한 신학대에서 5주 동안 단기 신학코스를 수료하려고 갔는데 거기서 한국 목사님 네 분을 만났어요.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였는데 이분들 말씀에 한국교회에 큰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한국 장신대로 유학오라고 권하시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아시아로 부르시는 뜻이 있겠다 싶어 1976년 4월 한국으로 왔어요. 정말 추웠죠.”(씽 목사)
▲미션학교와 신학대학의 모습.

유독 추웠던 그 해 4월, 씽 목사는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 붙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외국인이 많지 않던 시절 그에게 선뜻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주일이면 지정해준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사역비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씽 목사가 찾아간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부터 ‘OK’만 연발하지 도무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윌리엄 케리 선교사의 일화를 듣고 한국어 공부를 결심한 씽 목사는 기숙사 식당 아줌마의 도움으로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한국에 온지 1년여 지난 어느 날, 학교 탁구장에서 이 사모와 씽 목사가 만나게 됐다.

“I am 심심”
“No friend, no brother…”
씽 목사의 어설픈 한국어지만 관심을 갖고 들어주던 이 사모는 그의 적극적인 공세에 데이트를 시작했고, 3개월이 지나고 씽 목사가 불쑥 한마디 했다.

“결혼…합시다!”

당시 31살이던 씽 목사 역시 한국으로 오기 전 40번이 넘는 선을 봤지만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내심 이 사모를 보고 첫 눈에 반한 그는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청혼했다고 한다. 이 사모는 기도응답을 받아야 한다며 몇 년을 끌었지만,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 7년을 수일같이 여기듯 씽 목사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드디어 씽 목사가 배우자라는 대답과 함께 인도로 가라는 기도응답을 받은 이 사모는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았고 결혼식 당일 아침, 식장에 손 잡고 입장만 해달라는 큰 딸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식장을 찾았다. 이 날 결혼식에는 12나라 3500명 하객이 찾았다. 딸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순간, 뭔지 모를 큰 감동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그날 이후 예수를 믿게 된다.
▲미션학교 어린이들이 찬양하고 있다.

한편의 드라마 같던 만남과 결혼이었지만, 이후 씽 목사 부부의 인도선교는 또 다른 한편의 드라마다.

씽 목사를 따라 그의 고향에 정착해 목회 사역을 도왔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에 한국인들이 있다는 뉴델리를 찾은 이 사모는 우연히 대사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의 초청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씽 목사의 능란한 한국어 실력에 감탄한 지인들은 덥석 그의 손을 잡고 교회를 시작하자고 권했다. 대사의 아내를 비롯해 믿는 사람 몇 명이 주일에 모여 설교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선교사 부부를 붙잡은 것이다. 인도교회를 빌려 시작한 교회는 한국어 예배, 힌디어 예배, 그리고 영어 예배까지 생겨 크게 부흥한다.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씽 목사와 이 사모는 다시 한번 이 모든 걸 내려 놓는다.

“인도에 선교하자고 왔는데 목회가 너무 잘되니까 오히려 겁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주저 앉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North India Theological Seminary를 시작했어요.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급진적 무슬림이 많은 오리사 지역 출신 3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195명이 졸업한 정식 인가 받은 신학대입니다. 힌두 가정에서 온갖 핍박을 견디며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 이들이 신학교육을 마치고 전도사, 목사가 되면 먼저 자기 가족과 친척을 전도해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려면 너무 힘들어해요. NITS에서는 신학교육과 함께 자립해서 사역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합니다.”(씽 목사)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신학대 사역은 점차 열매 맺고 있다. 이와 더불어 7년 전, 미션학교를 설립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받기 시작해 지금은 7학년 어린이들까지 있는데, 이들을 위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연계해 교육한다는 계획이다. 학생들의 99퍼센트는 힌두교, 모슬렘인데 수준 높은 교육과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때문에 인근에서 인기가 높다. 수업 중에는 반드시 1시간 동안 성경을 배우고 찬양하는 시간이 있다.

“20세기의 사도라 불리는 인도의 성자 ‘썬다 씽’역시 독실한 힌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예수를 알게 됐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극심한 혼란 가운데 예수의 음성을 듣고 전도사가 됐지요. 이분처럼 비록 아이들이 표면적으로는 힌두 가정에서 자랐다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들려주고 성경을 접하면 변화되리라 믿습니다.”(이 사모)

씽 목사 부부는 신학대학이 자립해서 지속되어 갈 수 있도록 미션스쿨에서 나오는 학비(현재 1개월에 2.5불)로 신학생들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초등학교 인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등학교까지 설립해 500여명의 학생들을 받아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고 이 중 선별해 신학대에 들어가게 하면 인도의 부흥을 이끌 기독교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품고 있다.

서로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다. 씽 목사와 한 사모는 비록 얼굴 색은 달라도 30년이 넘는 세월 척박한 인도 땅에 눈물로 씨를 뿌리며 일궈온 생명력 넘치는 사역으로 인해 너무나 닮아있는 아름다운 부부였다.

(씽 목사의 사역에 대한 문의는 E-mail: v.jaimyong@hotmail.com 혹은 www.nitspictures.shutterfly.com으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