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한국 마켓을 갔다고 나오는데, 맞은 편에서 차 한대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가 저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차 안의 조수석에 타고 있는 여성분이 차 안에서 춤을 추는 광경 이었습니다. 흑인분들이 춤을 추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한국 분이 차 안에서 춤을 추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20대나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분들 같아 보였습니다. 과연 무슨 음악을 듣고 있었기에 그렇게 신이 나서 춤을 추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확실히 음악은 참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힘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대중 음악이던, 아니면 복음송이나 찬송가이던 사람은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찬미가 반드시 찬미의 제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찬양은 차 안에서 부를 수도 있고, 길 가다가도 부를 수 있습니다. 부흥회나 찬양 집회에서도 부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찬미의 제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냥 “찬미를 드리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찬미의 제사를 항상 드리자”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찬미와 찬미의 제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의 구절에 이미 답이 나와있습니다. 찬미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것, 또는 입술입니다. 찬미는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 찬미입니다. 그러나 찬미의 제사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서 찬미의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가 있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과 나무의 열매가 있기 위해서 그 사과 나무를 칭찬만 한다고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희생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희생이 있을 때 열매가 맺어지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믿음이 좋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방언의 은사를 한다고 자기가 마치 신령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방언을 한다고 해도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울리는 꾕과리와 같다는 것은 차라리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꾕과리와 같은 소리로 오히려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예언을 하고 신령한 꿈을 꾼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분열시키는일에 앞장 서는 것을 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한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가 있어도 열매가 없거나, 악한 열매가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찬미의 제사가 되기 위해서 어떤 열매, 또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까? 히브리서 13장 6절에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는 희생과 서로 나누는 사랑의 삶을 살 때에 바로 진정한 찬미의 제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술의 찬양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의 찬양은 그냥 내 기분만 즐겁게 할 뿐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찬양의 재능이 있으니까 부르는 찬양은 잘못하면 자신의 실력이나 과시하는 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입술의 찬양 위에 선한 행실과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진정한 찬미의 제사를 드릴 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미의 제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