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시인인 박목월의 시 가운데 “윤사월”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송화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윤사월 해 길다/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눈먼 처녀사//문설주에 귀대이고/엿듣고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외딴 봉우리”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라는 세 가지 비극의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내면적 설움과 고뇌의 소유자로 상징되는 “눈먼 처녀”가 외딴 봉우리의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산지기 외딴 집에서 송홧가루 휘날리는 윤사월 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변화를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꾀꼬리 울음소리를 통해서나마 찾아온 봄을 느껴보려는 열망이 “엿듣고 있다”는 말 속에 묻어나오는 듯 합니다.

요즘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 세상이 송홧가루로 물감칠이 되어있습니다. 저는 이 때 되면 차마 “두 눈 부릅뜨지” 못한 채, 길을 걷기에 필요한 만큼만 뱃새 눈 실처럼 가늘게 열고 삽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숨한번 제대로 크게 쉬지 못하고 숨죽이며” 사는 신세가 됩니다. 완전히 송홧가루에 주눅이 들어버린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차라리 외딴 집에서 문 닫아놓고 지내는 것이 낫겠다 싶을만큼 송홧가루는 보고싶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박목월의 윤사월 시에도 나오듯이 그 외딴 집이 외딴 봉우리, 그러니까 산 속에 있는 것이다보니 꾀꼬리 울음에 묻어서도 찾아오는 송홧가루인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고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처럼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송홧가루가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밀가루 부대에서 누룩처럼 번지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파워, 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날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산지기 외딴 집의 눈먼 처녀처럼 내면적 설움과 고뇌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 기대고 서서 엿듣는 그 애탄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모른채 영혼의 목마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울음” 소리가 아니라 “노래” 소리를 들려주는 꾀꼬리가 되어주십시오. 구원의 아름다운 “송홧가루”를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꾀꼬리 아름다운 노래로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여러분 주변에는 듣고 싶어하는 분들이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계십니다. 누군가가 손 내밀어 잡아주기를 고대하는 “희게되어 타작을 기다리는 곡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송홧가루에 비록 고생은 하지만 영혼구원의 열망을 품고 동역자를 부르시는 주님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자, 이제 함께 “꾀꼬리라 됩시다, ‘꾀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