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서 교인을 향한 가장 큰 희망은 나를 비롯한 모든 교인들이 행복한 교회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 찾아오는 가장 큰 축복은 내 영혼에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기쁨과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감사를 잃어 버리는 그 순간부터 행복은 실종되며 내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는다. 적지않은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평화를 상실하고 얼굴이 어두워지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온다. 담임 목회 초기 때에는 그렇게 행복해 하며 열심히 목회를 했는데 어느 시간부터 목회자로서의 그 초심을 상실하게 된다. 집사 때는 그렇게 행복하게 성실히 교회를 섬기는 분이 장로가 된 후부터 그 마음에 변화가 오고, 자주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을 듣게 된다. 차라리 그 분이 집사로 계속 남았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보게 된다.

왜 그런 변화가 찾아올까? 무엇보다도 그 리더십의 다이내믹에 변화가 오기 때문이다. 집사 때에는 주로 섬김의 리더십으로 교회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그러나 장로가 되면 그 리더십이 많은 부분이 행정의 리더십, 치리의 리더십으로 바뀐다. 영혼을 돌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는 일에서 행정의 리더십으로 들어가면 사역의 관심이 바뀌게 된다. 그로 인한 마음의 상태도 아울러 변모한다. 영혼 사역에 대한 관심보다도 교회가 재정을 어떻게 집행하고 목회자가 어떻게 자신을 대해 주는가? 하는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에 더욱 더 마음이 쏠린다. 일 중심의 목회가 되면서 마음의 갈등이 지난 날보다 자주 발생한다. 내 몸에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형성되기 시작된다. 그 때부터 말씀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마음보다도 관려주의적 모습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교회를 향한 주인의식이 몸에 배이면서 지난날의 섬김의 마음들이 퇴색되고 시작한다. 목회자도 평신도 리더들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교회는 권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돼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란 억지로 남을 복종시키거나 타인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강제력을 동원해서, 혹은 규제를 통해 남을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복종하려는 자세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민주적인 태도가 온 교인들에게 심화되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은 교인들에게 외면당하기 쉽다.

진정한 리더십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나의 리더십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영성, 인격, 도덕적 감화력을 통해 나의 진정한 권위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양적 리더십이 강화되어야 한다. 현장의 리더십, 즉 심방과 가르침의 사역을 통해서 교인들의 영성과 삶의 현장을 체험하고 함께 그들과 울고 웃는 공감적 경청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로 시작해서 모든 평신도 교인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고 기쁨이 넘쳐나야 한다. 자발적인 섬김이 터져나오고 자원의 심정으로 더욱 더 교회를 섬기는 즐거움이 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서로를 견제하고 정치적으로 조정하고 서로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를 머지않아 이전투구의 현장이 될 수 밖에 없다.

적지않은 이민 교회 지도자들이 오늘날 엄청난 변화의 파고를 타고있는 교인들의 일상의 현실과 그들의 수평지향적인 사고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난날의 권위주의적 자세를 내려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 인해 교회에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이 그칠 날이 없다. 먼저 지도자들이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 내 마음에 찾아오는 끊임없는 아집과 교만과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 섬김의 리더십으로 바뀌는 거룩한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를 잘 이해하고 그것이 단지 청지기적인 산물임을 깨닫고 내가 섬기는 사역의 기간동안 겸손히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행복의 전령사가 되어야 한다.

한 교회 수준은 그 교회의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들의 리더십 수준을 뛰어 넘을 수 없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