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경에 권총으로 무장한 월남 갱단이 뷰포드 한인 타운에 나타났다.

약 3~4개월 동안 월남 갱단은 8차례에 걸쳐 7개 한인 업소를 대낮에 돌며 금품과 귀금품 등을 강탈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애틀랜타 한인들이 뷰포드 한인 타운이 무섭다고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한인 타운의 사업체에 크나큰 지장을 주었다.

월남 갱단들이 극성을 부리게 되자, 털리지 않은 업소도 2번씩 털렸다는 소문이 크게 퍼지는 등 허위 사실들이 난무하게 되었고, 이러한 루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업소들도 나타났다.

당시 월남 강도 피해 소문이 가장 먼저 시작되어 곤욕을 치른 우촌면옥 사례를 소개한다.

“저희 업소에서 강도 피해를 당했다고 소문을 낸 사람을 알려주시는 분에게는 5천 달러에서 10만달러까지 사례금을 드리겠습니다.”라면서 실체가 없이 떠도는 월남 강도 피해 소문으로 곤욕을 치르던 우촌면옥의 이은천 사장(44세)이 소문의 진상 규명에 나섰다. 그는 터무니없는 낭설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며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94년 6월 25일 지미카터 선상에 개업하여 1백50석 좌석을 80~90%까지 꽉 채울 만큼 손님을 끌었던 우촌면옥이 어느 날 갑자기 ‘월남 강도 피해 업소’라는 사실 무근의 소문에 휘말려 매상이 곤두박질치는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그 동안 세탁협회의 친목계 모임이 한번 있었을 뿐 부부동반 계모임이 없었습니다. 계모임 하다가 강도를 당했다는 소문이나 강도가 손님과 종업원들의 옷을 벗기고 현금, 귀금속 등을 강탈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입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우촌면옥은 쇼핑 센타 내에 위치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경찰 순찰도 많을 뿐 아니라 전면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강도가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당시 메트로 애틀랜타 내의 월남계 인구는 5만이고, 뷰포드 한인 타운에 나타났던 월남 갱단은 시카고, 워싱턴 디시,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에서 활동하는 갱단으로서 범죄를 저지른 후 되돌아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무렵 애틀랜타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월남 갱단은 약 30개나 도리 것이라고 비공식으로 집계되었다. 월남 갱단의 평균 연령은 16~25세이고, 미성년자가 많아서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흉폭한 것이 특징이라고 월남인들은 알고 있었다.

한인 사업체들은 월남 갱단들의 백주 강도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하였다. 우선 제 1단계로 낮에도 안에서 문을 잠그고 손님이 오면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방법을 취하였고, 유리창에 붙여 놓은 모든 것을 떼어내어 밖에서 안이 잘 보이게끔 하였다.

한인회 산하 안전대책위원회(위원장 이승남)는 1995년 9월 16일 대책회의를 갖고 대응책 마련을 위한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안전대책위원회와 한인 타운 번영회가 주축이 된 긴급대책위원회는 9월 17일 오후 3시 첫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먼저 피해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도라빌, 디캡 경찰서를 방문하여 범인 체포와 예방 순찰 강화를 촉구하는 한편 2천불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들을 현상 수배하기로 하였다. 특히 긴급대책위는 도라빌, 디캡 경찰서 등에 근무하는 동양경찰관으로 이루어진 특별 수사대 구성을 요청하였다.

긴급대책위원회는 9월 21일 2차 모임을 갖고 업무 추진의 실효성을 위해 위원장을 김종우 한인타운 번영회 이사장으로 교체하고, 9월 25일(월)에는 조지아 수사국과 대 테러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1995년 9월 20일 오후 4시 장훈 총영사는 조지아 주 수사국을 방문하고 밀튼 닉스 주니어 국장에게 최근 한인 타운을 중심으로 발생한 연쇄 월남 갱단 강도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였다. 또한 1995년 9월 22일 한인 타운 번영회는 긴급 방범 대책 회의를 열고 월남 갱단 강도 사건을 해결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범인 현상 수배와 방범 순찰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우촌면옥, 서울가든, 아시아나가든, 가람식당, 해운대갈비, 고향집 등 식당 대표들이 참석하여 “사실 무근의 헛소문으로 식당들이 영업에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타운 번영회 차원에서 사실 확인을 하여 소문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뉴욕에서 1980년대 후반에 결성된 유명한 월남 갱인 ‘본 투 킬(Born To Kill)’ 갱단의 핵심 멤버가 1991년 연방 수사관에 의해 체포되자, 나머지 월남 갱단이 전국으로 도주하여 애틀랜타 지역의 ‘록담’ 갱단과 함께 조직을 키워 동남부 6개 주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록담’ 갱단의 멤버들은 6개 주에서 11건의 살인 및 살인미수, 12건의 강도 및 가정 침입, 4건의 유괴, 23건의 강탈 사건으로 아트리치 검사에 의해 고소되었다.

이들은 많은 현금을 갖고 있던 기업체 사장으로부터 라이벌 갱단의 단원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무차별하게 살인하고, 강도 강탈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갱단은 체포되더라도 중형을 받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기소된 26명 중 대부분은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국 군인과 베트남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라시안’이었으며, 이들 ‘아메라시안’ 어린이들은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미군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도 배척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 정부에서 ‘아메라시안’ 어린이와 그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호처를 제공하자 그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해 왔던 것이다.<계속>
(한인이민사 14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