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전령, 수선화가 피었다. 부지런히 기지개를 펴고 꽃샘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선화는 몽우리를 맺더니 아름답게 교회 앞마당에 피어났다. 가냘프고 수줍어 보이는 봄 꽃의 자태에 한참이나 반한 듯, 그저 보기만 해도 주님의 창조에 취한 모습이 된다. 작은 꽃 하나에도 행복이 가득해 지는데 봄 꽃이 온 만상을 덮을 땐 천국의 모형을 보는 듯한 감상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겠다.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만상의 지혜를 철들지 못한 인간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철들라고 고난도 주시는 것 같다. 역시 변수라는 뜻하지 않았던 인생의 숙제를 끙끙거리며 풀려고 하지만, 그 난이도는 학창시절에 손에만 넣고 있었던 테크닉 수학 보다 어려웁기 마련이다. 아니 해법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삶의 신비, 고난의 신비를 풀어가기란 간단치 않음에 무릎 끓고 끙끙거린다. 그만큼 삶의 변수는 믿음으로 채워졌을 때 알아지는 하나님의 공간 같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간을 침범 하듯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가두어 두려한다. 그래서 개연이나 가설이란 도식을 갖다 대면서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 안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가두어 두려는 자만이 자기란 한계를 넘지 못하는 우매 안에 갇히곤 한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는 변수를 애써 무시하려는 모양은 하나님이 인간의 세계에 간섭하시려는 의지를 외면함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안에, 우리 안에, 온 세상 안에 계시고 사랑의 손길로 오늘도 그 온기를 전하고 계신다. 마치 수선화의 꽃 몽우리가 꽃을 피우게 되는 섭리를 막을 장사가 없듯이 주님은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종종 우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특히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몽매, 무지와 깨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다시금 발견해 보려 한다. 그러나 무지개를 잡으려 하듯이 많은 경우가 텅 빈 절기로 끝나는 것 같다. 늘 이런 우매를 모르지 않지만, 숨어있던 교만은 거인이 되어서 주인 노릇함이 마치 본성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한계와 처절히 깨어져야 할 죄성에 절어버린 존재임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알리려 하지만, 역시 절기라는 테두리 안에 스스로 안주하며 종교성에 만족하는 모습은 혹시나 종교적 매너리즘에 익숙한 신자가 되지 않을까 스스로 염려가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절기라는 년 중 행사에 혹시라도 방임된 존재로 하나님을 절기 안에 가두어 경험하려기 보단, 주의 섭리가 작은 꽃에서도 역사하심을 느껴 보는 지혜로 사순절의 묵상이 있으면 어떨까? 이렇듯 작은 꽃 속에 깃든 주의 사랑을 보면서, 하나님이 인생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크실지, 그래서 주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함이 얼마나 귀할까? 그럼으로 구도자의 모습이 되어 내짐에 허덕이는 인간이 아니라 남의 짐도 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신자가 되기를 소원드림이 사순절의 묵상으로 있다. 즉 거리를 적당히 두고 부담이 있는 곳은 적당히 피하고 혹시라도 이익이 되는 곳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는 얄팍한 인성이 부서져야 할 아둔한 자의 기도로, 그리곤 주의 임재 속에 십자가 고통을 아는 신자가 됨이 지혜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