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사람, 목회자의 중보자가 되어 성도와의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바로 사모다. 본지는 애틀랜타 사모들의 간증과 함께 사모가 가져야 할 역할과 사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두번째로 뷸라하이츠신학대학 부총장 김요한 목사의 반려자, 김형순 사모를 만났다.

“목회자가 소명을 받아야 하듯 사모도 마찬가지”라는 그녀의 또 다른 직업은 간호사다. 수의사가 되기 위해 UGA 학업을 앞두고 있던 남편 김요한 목사와 애틀랜타에 이민 온 것이 1976년이다. 학업에 열중해야 할 남편이 갑자기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다고 하더니 얼마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했을 때 김 사모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나님이 정말 부르셨다면, 나에게도 보여주세요!

김형순 사모는“하나님께서 남편을 부르셨으면, 사모가 돼야 할 나도 부름을 받아야 한다”라는 강한 신념 아래 기도도 했고, 소명 여부에 대한 남편과의 말다툼도 몇 차례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콜롬버스에 열린 부흥회에서 김 사모는 완전히 뒤집힌다.

“당시 설교자로 강단에 선 프리맨 목사님이 설교도 하시기 전에 저를 지목하며 일어서보라고 했습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목사님, 그것도 미국교회 부흥회에서 그런 지목을 받게 되니 난감했지만, 일어섰지요. 그랬더니 ‘지금 천사가 나에게 와서, 하나님이 그를 불렀다고 당신에게 말하라고 한다’고 전해주지 뭐에요. 부흥회에 가던 길에 ‘당신을 정말 (하나님께서) 불렀나 안 불렀나’에 대해 남편과 말다툼을 했는데, 부흥회에 도착하자마자 전혀 모르는 목사님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었겠어요! 그 뒤로부터는 무조건 순종, 순종뿐이었죠.”

김 사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는 시작된다. 어린 자식 돌보랴, 남편의 늦은 신학공부를 뒷바라지 하며 바쁘던 그녀는 33세, 셋째를 낳고 그만 산후풍과 갑상선 합병증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큰 고비를 맞게 된다.

갑자기 찾아온 산후풍으로 의식잃어

셋째 아이를 낳은 후 산후풍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오른쪽 관절 마디마디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당시 한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두 번 뜨겁게 안수를 해 주시더니 안됐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시는 걸 봤어요. 보면서도 말이 안 나왔죠.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데… 다 보이는 데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당시 남편은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극으로 치달아 병원에 입원한 김 사모는 의식조차 불분명한데다 온 몸이 퉁퉁 부은 채 척추에서 몇 차례 물을 뺀 상태였고, 남편조차 접근금지 상태였다.

그 때 그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저를 데려가 달라”는 절박한 기도를 올렸다. “남편이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전할 때, 옆에서 부인이 손도 제대로 못 쓰고 덜덜 떨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나왔고 병원 간호사들이 달려와 뇌까지 염증이 옮겨간 게 아니냐며 의심을 하자, 속으로 기도해야겠다는 지혜를 받고 속으로 기도를 하기 몇 분, 아니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 상태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찬송가 454장 천국가는 밝은 길, 눈으로 볼 줄이야

김 사모는 당시 천국체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데, 깜깜한 밤 중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켜지는 듯한 밝은 빛이 아픈 제 상반신을 비추니 아픈 것이 싹 사라졌어요. 아~ 너무 좋다! 라는 생각으로 빨리 저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죠. 빛을 타고 누군가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어요.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어요. 제가 병실에 누워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며, 간간히 눈물을 보이던 그녀는 “그렇게 얼마나 갔는지 몰라요. 딱 올라가니까 너무 좋고 장엄해서, 감히 내가 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죠. 내시처럼 손을 모으고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한참을 어딘가에서 기다리던 제가 갑자기 깨어 났는데, 병실이었어요. 그 후 아픈 것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고, 손 떨리는 것도 없어졌죠.”

거짓말처럼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깨질 것처럼 아프던 머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깨어나 의사를 불렀고, 병원 관계자들 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증세는 완전히 회복됐다. 퇴원을 하자 나뭇잎 하나 조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듯 해 온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구름 위를 걷는 듯 했다.

또 한번의 고비, 갑상선 이상으로 발병한 우울증

그녀는 한 달 후 두 번째 고비를 맞는다. 갑상선 호르몬 이상으로 우울증이 생겨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너 얼마나 아픈지 봤지?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거야’라는 알 수 없는 환청으로 시달렸고, 늘 약을 먹어야 했다. “약을 먹기 전에 늘 약을 붙들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약 먹지 않고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고, 살 소망도 끊어졌었다는 그녀는 누가 봐도 어두운 얼굴을 하고 다니길 2년이 지나서야 완전히 치유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려운 사람만 보면 저절로 기도하게 돼

남편인 김 목사가 아내를 끔찍히 챙기는 모습에 종종 주변의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다며 김 사모는 싱긋 웃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즐겁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이 나의 구주가 된 것이 너무 기쁘다. 주님은 나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신다”며 미소를 지었다.

두 번의 생사 고비를 지나고 나서 김 사모에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기자가 물으니 ‘병이 있거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만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고, 치유기도를 저절로 하게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사모 초년생(?)에게 남기는 조언으로 김 사모는 “사모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늘 있어야 한다. 말과 행동을 늘 주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보는 자기반성시간이 있어야 한다”면서 “사모도 사람이니까 실수를 할 수 있는 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으로 고침을 받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사모는 “사모들은 남모르는 고통이 많지만 마땅히 이야기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사모회에 오셔서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모회에 많이 참석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