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교 역사상 최악의 재난 중 하나였던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한국 개신교 선교 현장에 미친 영향이 최초로 연구 발표됐다.

6일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열린 제282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주제발표한 이혜원 씨(연세대 석박사통합과정)는 “한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과거부터 중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곤 했다”며 “의화단의 초기 목표는 모든 기독교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므로, 중국 선교현장에서 이뤄지던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하고 폭력적인 공격 소식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고 설명했다.

중국 인접한 북부 지역, 여러 박해사건 발생

1899년부터 1900년까지 중국 북동·북서 지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세운 폭력적인 기독교 배척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중국 근대 역사에서 벌어졌던 두 번의 커다란 기독교 배척운동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 많은 선교사들과 중국 기독교인들(가톨릭·개신교 포함)이 살해되거나 약탈을 당했다. 대략 4만명이 넘는 가톨릭·개신교인들이 이 운동으로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 의화단 운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세력은 자생 종교였던 동학(東學)도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의화단을 따르고 모방하면서 한국 기독교 사회도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났으며, 한국 내 선교사와 서양인들은 의화단 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

실제로 중국과 인접한 북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동학도와 지방관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경남 밀양과 대구 등지에서도 이같은 무리들이 출몰해 선교사와 서양인들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동학도들은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의 소유물을 강탈했는데, 이들은 거대한 종교 단체였기 때문에 넓은 지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이같은 일들을 저질렀다.

에스더서처럼 선교사와 기독교인 모두 ‘도륙’당할 위기 놓이기도

특히 의화단 운동은 일명 ‘도륙비지사건(屠戮秘指)’을 부른 원인이 됐다. 이는 1900년 겨울 친러파 세력인 내장원경 이용익과 평리원재판장 김영준이 반미 감정에 휩싸여 황제의 밀명이라며 몇날 며칠에 일제히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밀서를 각지에 배포한 사건으로, 당시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까지 보고될 정도로 선교사 사회를 긴장하게 만든 동시에 구한말 발생한 대표적 박해사건이었다.

이혜원 씨는 “나중에 이용익과 김영준의 이름이 밀서에 들어간 것은 모함이라고 결론내려졌다”며 “즉 도륙비지사건은 단순히 반미 감정에 휩싸인 두 명의 고관이 꾸민 개인적인 음모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행히 해주를 여행 중이던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가 우연히 밀서를 손에 넣고 이 소식을 라틴어로 은밀히 서울에 알리는 기지를 발휘해 사전에 발각됐다.

이혜원 씨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며 “평양 및 북쪽 지방에서 급격히 늘어나던 동학도들이 의화단 영향을 받아 한국의 모든 선교사(혹은 외국인)와 기독교인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의화단의 영향을 받은 반서양·반기독교 정신에서 배태된 소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씨는 “밀지 말미에 덧붙인 ‘모든 전보 케이블을 파괴하라’는 명령만 봐도 의화단을 모방한 시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며 “의화단은 가는 곳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중국의 기를 막고 있다며 제일 먼저 전보 케이블과 철도를 파괴했고, 이는 체계적인 군사전략에 의한 것이 아닌 의화단의 대표적인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국가간 기독교 관계사 연구 필요하다

의화단 운동은 미국과 캐나다 선교본부를 아연실색케 했고, 사건이 마무리된 1900년 이후 선교 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기독교 교육사업 등 교파간 연합사업이 증대했고, 현지 선교사들 사이에 대두됐던 ‘선교 에큐메니즘’이 의화단 운동 이후 선교 정책과 접합되면서 선교 방법 및 정책이 다변화됐다. 또 그간 선교사들과 제국주의의 밀접했던 선교 방식에 대한 근원적 회의가 일면서 새로운 선교지에 들어갈 때 선교 접근과 방법론도 달라졌다.

이혜원 씨는 “이런 선교 정책적 변화는 한국 선교 현장과 무관할 수 없었다”며 “한국에서도 의화단 여파로 동학에 의해 기독교 및 서양인 배척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특히 ‘도륙비지사건’으로 제물포에서 한 명이 살해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구타·약탈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행히 의화단 운동 여파로 계획됐던 한국의 ‘반외세 기독교 박멸 시도’는 불명예스러운 실패로 끝나버렸고, 이후에는 더 이상 중국에서 감지되는 반기독교적 정서를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씨는 “도륙비지사건은 한국 개신교 초기사에서 중요한 박해 사건으로 간주되면서도 아직 사건의 전말에 대해 정확히 연구된 것이 없었다”며 “이를 이해하려면 중국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관계사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그 배경과 전모가 드러나듯, 국가간 기독교 관계사 연구는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사각지대에 놓여있거나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더 밝혀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