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보로 도시선교 당시 에밀리 장크 양(왼쪽)과 한 어린이.
조지아로 도시선교를 왔던 에밀리 장크(Emily Zanke, 21세) 양이 1년의 일정을 마친 후 고향인 미시간으로 돌아간다.

한국인 입양아인 그녀는 2008년 9월을 시작으로 2009년 8월까지 1년 간 존스보로 저소득층 아파트에서 동료 5명과 함께 숙식하며 주변 이웃을 돌보는 도시선교(Urban Mission)을 했다.

이웃을 방문해 음식을 전해주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전하는 도시선교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에밀리 양은 선교기간이 끝난 후에도 7개월 간 팬아시안커뮤니티센터(CPACS)에서 봉사하며, 애틀랜타에 머물렀다.

“애틀랜타에서 선교 하면서 신앙이 말씀의 반석에 굳게 선 느낌이에요. 신앙을 깊게 해 준 이 곳에 좀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에 7개월을 더 있게 됐어요. 한국 분들과 이렇게 가까이 지낸 것도 처음이라 더 머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에밀리 양은 양부모님이 계시는 미시간으로 3월 17일 돌아간다. 대부분이 흐린 날씨의 미시간에 가면, 따뜻하고 화창한 겨울의 애틀랜타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며 싱긋 웃는 에밀리 양에게 도시선교와 애틀랜타 생활에 대해 질문했다.

-도시선교가 어떤 것인지 소개해 줄래요?

선교 오기 전 생활비 12,000불을 펀드레이징해서 1년 동안 생활비로 사용했어요. 일주일에 집세와 식료품 값으로 80불, 생활비는 70불로 한정돼 있는 상태에서 마르타(MARTA)만을 이용해 지냈고, 딱 한 대의 자가용만 응급상황을 대비해 가져올 수 있었죠. 철저히 그들의 생활 패턴과 동일하게 살면서 이웃이 되는 과정이었어요.

존스보로에 위치한 토마스 빌 하이츠에서 생활하면서, 일주일에 40시간 정도 지역교회를 섬기는 시간이 있었어요. 토요일에는 주변 이웃들을 방문해서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희 팀은 총 6명이었고, 미시간, 오하이오, LA, 마이애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왔어요.

-도시선교를 하면서 어땠나요? 반응은 좋았고요?

관계적인 전도가 대부분이었어요.

가장 신경 쓰였던 점은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는 것을 넘어서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흘러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 관계에 집중했죠.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도 고작 1년을 섬긴 것인데요... 처음엔 이런 생활을 어떻게 1년을 계속하나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났을 때는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데, 더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죠.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요?

한번은 요리를 하다가 집에 큰 불이 날 뻔했어요. 치킨을 튀기다가 불이 붙었는데, 기름에 물을 부으면 안되는 것을 잊고 물로 끄려고 하다가 더 큰 불이 된거죠. 그 때 이웃들이 두 팔 걷고 도와주셔서 금방 끌 수 있었어요.

늘 도와주는 자리에 있다가 도움을 받았을 때 '아! 이웃은 이런 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됐죠.

▲도시선교를 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찍은 사진.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됐는 지 궁금하네요.

15살 때였어요. 원래 부모님과 저는 천주교를 믿었는데, 성당만 나가는 정도였죠.

제 삶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교회에 전도를 했어요. Youth 목사님께 '나도 구원받고 싶어요(I wanna be saved)'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지금은 그 목사님을 제 2의 부모님이라고 부를 만큼 친근해졌고, 제 신앙을 많이 이끌어주세요.

-어둠의 터널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네, 저는 민감하고 감정적인 편이에요. 부모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옷을 사주거나 음식을 사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셨고, 민감하고 감정적인 나는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적었죠. 친구들도 그 시기에 많이 잃었고, 방황할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 읽은 기독교 시리즈 책인 My life is teenage girl을 통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 친구가 교회로 나를 데려가서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상황을 이끌어가셨다고 확신하게 되요.

-애틀랜타를 떠나는 기분은 어때요?

애틀랜타의 생활은 제 인생의 축복의 기간이었어요. 선교를 하면서 제 신앙이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 것을 느낍니다.

미시간에서는 600명 학교에 3명 정도가 한국학생이었어요. 제 친구들은 모두 백인이고, 한번도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는 데, 이제는 정이 들어서 떠나기가 쉽지 않네요.

-한국 사람과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 있어봤다니 놀랍네요. 그럼 처음 한국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어땠나요?

처음에는 문화충격(Culture Shock)이 컸어요. 음식과 한국문화 모두 익숙하지 않아서, 김치도 처음 먹어봤는 데 너무 매웠죠.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떠나기 싫을 만큼 한국친구들이 좋고 김치도 너무 잘 먹어요. 알아듣지 못해도 한국말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요. 피는 못 속이는가 봐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실한 한가지는 남은 내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내가 그 분과 동행할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대학교를 졸업하려면 아직 1년이 더 남아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