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도, 절도에 의한 한인들의 희생과 피해

강도와 절도에 의한 한인들의 희생과 피해가 한인들이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인들이 미국 땅에 정착하여 터전을 잡아나가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한인들의 희생과 피해가 정도의 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 1993년 2월 24일부터 3월 초까지 발생한 5건의 강력 사건들

주간동남부 1993년 3월 9일자 기사는 연쇄 강력 사건에 으이한 한인들의 희생을 다루고 있다.

1993년 2월 24일 락데일 카운티 코니어 시에서 식품점(Community Grocery)을 운영하던 고 권재봉 씨(56세) 강도 피살 사건에 이어 이튿날 2월 25일 밤 10시경에는 다운타운 페리 블러버드에서 주류점(Perry Liquor Store)을 운영하던 문정우 씨(60세)가 흑인 강도로부터 5발의 총상을 당했는가 하면, 사흘 뒤인 3월 1일 오전 8시 30분경에는 모어랜드 애비뉴에서 식품점(Big H Store)을 하던 이철호 씨(27세)가 역시 흑인 강도에게 복부와 다리에 2발의 총상을 받았다.

또 이날 오전 11시 경 샘블리 던우디 소재 써밋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한 한인 김수명 씨(주류 판매업)가 근처 주유소까지 뒤따라온 동양계 범인에게 탈취 위협을 받았으니 김씨가 먼저 권총을 꺼내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하는 등 최근 6일 사이 한인을 상대로 한 4건의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다운타운 그래디 메모리얼 병원(Grady Memorial Hospital)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인 문정우 씨는 범인이 쏜 7~8발의 총탄 중 팔, 가슴, 복부 등 가까스로 급소를 피한 5발의 흉탄을 맞았느나 장장 7시간의 대수술 끝에 충탄을 모두 제거하여 절명의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문씨의 장녀 혜정(메릴랜드 거주)에 따르면, 문 씨는 1993년 2월 25일 밤 10시경 방탄유리가 설치된 캐쉬어 레지스터 문을 잠시 열어 둔 사이 침입한 흑인 강도로부터 다짜고짜 피격되었으며 몸에 소지했던 지갑과 자동차 열쇠 등을 강탈당하였다.

또한 현재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인 이철호 씨는 1993년 3월 1일 흑인 손님으로부터 2발의 총격을 받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이철호 씨에 의하면, 범인은 17세 가량의 흑인 소년인데 호주머니에 총기로 보이는 물건을 휴대한 것을 느낀 이씨가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범인이 창구 사이로 권총을 들이밀며 총격을 가하고 도주한 것이라고 한다.

주간동남부의 동일 기사에는 고 권재봉 씨 영결식 거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 오열하는 부인 권정자 씨와 두 딸(미영과 현영)이 지켜보는 가운데 2월 24일 흑인 복면 강도로부터 피살된 고 권재봉 씨의 영결식을 1993년 2월 27일 커녀스(Conyers)에 위치한 Harry White Funeral Home(장례식장)에서 가졌다.

수많은 한인들이 참석한 영결식장에서 한인회를 비롯한 각 단체와 개인이 보내온 화환들로 내내 숙연함이 감돌았고, 여기저기서 권씨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울먹이는 소리만 가득하였다. 애도 인파의 허탈감 속에 고인의 유해는 장지인 플로랄 힐 메모리알 가든(Floral Hill Memorial Garden)으로 옮겨져 한의택 한국 장로 교회 목사에 의해 하관 예배가 집행되었다. 헌화하는 참석자들의 상기된 눈자위와 울부짖는 유족들의 표정은 모두를 망연하게 하였다.

또한 1993년 3월 초에 모나미 인터내셔날 회사의 관리인으로 근무하던 한인 여성 전현숙 씨가 부하직원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 전현숙 씨는 1964년도 10월 경상북도 대구 근교 칠곡에서 태어나 9세 때인 1974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에모리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 조지타운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으로 학생 시절 동안 내내 장학금을 수혜하였으며, 학비를 포함한 모든 경비를 스스로 충당할 만큼 부지런하였다. 그녀는 1990년 조지아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92년 부터는 한국 모나미사 미국 지점 총책임자로 발탁되었는가 하면 카터 대통령 센터에서도 근무한 바 있고, 미 동남부 경제인 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아 사회 봉사 활동에도 열성을 보였다. 유족으로는 남편과 3살 된 딸 테스 게일 양이 있다. 고 전현숙 씨의 추모 미사는 한인 천주교회에서 1993년 3월 7일 오후 1시에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