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 사랑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1952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가 25년 간 머물며 많은 사랑을 전했던 드와이트 린튼 목사는 미국 조지아로 돌아온 후에도 한인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았으며 지난 1월 11일 조지아주의 게인즈 빌에 있는 체스넛 마운틴 교회에서 열린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귀가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리산에서 인돈 부부와 네 아들. 왼쪽부터 윌리엄, 드와이트, 휴, 유진.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풍토병에 시달렸다. 이들은 당시 요양을 위해 지리산 노고단의 선교사 캠프를 마련했다. ⓒ한남대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는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ㆍ1891~1960) 선교사는 한남대 설립자로서 근대 한국사회에 큰 기여를 했으나, 널리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다. 특히 린튼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 선교사이다. 그의 특별한 한국사랑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4대(代)에 걸쳐 한국에서 봉사하고 선교하며 한국 땅에 뼈를 묻은 후손들도 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바로 애족장이 추서된 윌리엄 린튼 목사가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군산영명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린튼 선교사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고,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린튼 선교사는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피했으나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했고 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병 치료도 미룬 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던 그는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숨졌다.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한국에서 선배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ㆍ1868-1925) 목사의 딸 샬롯(한국명 인사례)과 결혼, 아들 4명을 모두 한국에서 낳고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들 가운데 셋째 휴 린튼(한국명 인휴ㆍ1926~1984)과 넷째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ㆍ1927~ 2010)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교육ㆍ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휴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ㆍ83)도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과 호암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베티 여사의 집은 미국을 방문하는 북한 대표단이 머물다 가기도 하는 등 남북한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돈가 가계도 ⓒ한남대

휴 목사는 교통사고로 숨져 한국 땅(순천)에 묻혔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낸 드와이트 목사는 올해 1월 미국에서 역시 교통사고로 숨졌다. 린튼 선교사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유진 벨 선교사로부터 따지면 4대에 이른다. 인휴 목사의 아들 스티브(한국명 인세반ㆍ59)는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모두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1997년부터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도 수차례 만난 북한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또 그의 동생 존(한국명 인요한ㆍ50)은 한국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토종’이다. 두 형제는 모두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미국의 세계적 생명공학기업인 ‘프로메가(PROMEGA)’ 대표인 빌 린튼 3세(62)는 윌리엄 린튼 목사의 장손(長孫)으로 인세반, 인요한과는 사촌 간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설립한 한남대를 2004년 방문해 500만 달러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이후 한남대에 프로메가 BT 교육연구원이 설립됐다.

이밖에도 린튼 가문은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를 설립해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 인돈 박사가 유언으로 칠판에 남긴 교육지침 1. 수업은 정시에 시작한다. 2. 수업은 정시에 끝낸다. 3. 모든 학생에게 과목마다 숙제를 내준다. 4. 교수와 학생은 결강하지 않는다. 5. 기독교 분위기를 유지한다. 1960. 6. 총장 윌리엄 린튼 ⓒ한남대

한남대는 설립자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1994년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인돈학술원을 설립, 매년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사에게 인돈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국제학부인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설립, 우수한 국제화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한편, 시상식은 3월 1일(월) 오전 10시 제91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리는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기념관에서 거행될 예정으로 수상은 유족을 대표해 손자인 인요한(John Linton) 신촌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