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발생한 다음날, 애틀랜타 흑인 사회의 움직임이 위험 수위를 넘어 애틀랜타에서도 한인 피해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심각성에 애틀랜타 한인회 산하 안전대책위원회(위원장 이승남)는 긴급 회동을 갖는 한편 애틀랜타 한인 상공회의소 사무실에 긴급 상황실을 즉각 설치하였다.

긴급 상황실은 이승남 안전대책위원장을 실장으로, 공식대변인 지형석 목사(한흑친선위원장)와 이준남씨, 시장-경찰국 담당 강석영씨(한인민주당 의장), 흑인 단체 담당 방남규 씨(전 조지아 한인 식품협회장), 법률 자문 최진 변호사, 섭외 담당 이만호씨(대책위 부위원장), 행정 담당 정수진씨(한인 상공회의소 부회장)로 진영을 구성하여 사태에 대비하였다.

사흘간의 대기 체제에는 이만호 씨, 정수진 씨, 송규형 씨가 밤샘을 하고 우원득 한인 상공회의소 회장과 유준식 한인 식품협회장, 조국진 주류협회장 등이 이들을 격려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피해가 일어난 5월 1일 TV를 지켜보던 상황실 요원들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고 손을 쓸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책위는 사태가 진정된 3일과 4일 연속 회의를 열고 이번 사태에 대한 경과 보고와 함께 사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4일의 대책 회의에는 손칠영 한인회 회장과 김현곤 애틀랜타 총영사도 참석해 긴급 상황실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처 방안 모색 등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안전대책위원회는 한, 흑 갈등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특히 유대인 커뮤니티(American Jewish Committee) 대표단과 회동하여 의견 교환을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인들은 유대인의 경험을 듣고 그들의 유익한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1992년 5월18일 저녁 7시30분 연경반점에서 양측 관계자 20여 명이 모여 한인 측이 제공하는 만찬을 같이 나누며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1992년 5월 25일 발행한 코리안 저널에 게재된 내용이다.

유대인들이 흑인 사회에 뿌리를 내릴 때와 지금의 사정은 약간 다르지만, 그들은 비록 영어가 통하지 않던 시절에도 흑인들과의 융화를 위해 흑인 사회에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흑인 지역 주민 행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흑인 주민들과 좋은 유대 관계를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지역 언론의 편파 보도에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나 정면으로 언론에 도전하지 않고, 언론인 하나 하나를 불러 교육을 시켜 점차 개선을 가져왔다고 한다.

흑인 사회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업주 대다수가 유대인들로부터 가게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고 또한 다수의 한인들이 유대인들이 걸어 온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피력하는 여러가지 의견들은 한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100여 년의 이민 역사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지만 실제로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거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고 하며 현재 미국에는 5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고 애틀랜타에는 7만여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날의 모임은 지난번 흑인 폭동 이후 유대인 위원회와 애틀랜타 잭슨 시장과의 면담 자리에 우리 한인들이 초청을 받아 첫 상면이 이뤄진 후 우리측의 초청으로 이뤄진 것이다. 한편 안전대책위 측에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번의 흑인 사태에 대한 미국 언론과의 기자회견은 갖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