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가 25년 간 머물며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던 드와이트 린튼 목사. 그는 미국 조지아로 돌아온 후에도 한인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린튼 목사는 미국장로교단(PCA) 국내선교부 소수인종부 담당자로 한인선교, 흑인선교, 중국인 선교 등의 총 책임자를 역임하며, PCA 내 한인목회자 모임의 입지를 굳히는 데 기여했다. 또 1987년 12월 김대기 목사와 함께 한인 1세를 위한 마리에타 성약장로교회와 한인 2세를 위한 오픈도어커뮤니티처치를 개척했고, 조지아선교대학을 설립해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린튼 목사 장례예배에 참석한 한인목회자들은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 “한인 목회자들을 깊이 이해하신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조준 목사(전 영락교회, 갈보리교회 원로목사)는 “한국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분이다. 외국인으로서 타민족을 위해 복음을 평생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며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 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린튼 목사님의 가족이 지금도 북한 우물 파기 등 여러 가지로 고생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부끄럽기까지 하다. ‘지금 돕지 않으면 앞으로 통일이 됐을 때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이렇게 잘 살면서 왜 우리를 돕지 않았나’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부끄러웠다. 도울 수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장석민 목사(애틀랜타교회협의회장, 중앙성결교회)는 “한국인들의 영적 체계를 주도했던 한 가문의 선교사님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 린튼 목사님이 한국사람에게 넘겨주신 신앙적 영향력이 크다”라며 “한국인들이 같이 뜻을 모아 그를 기릴 수 있는 추모의 밤을 따로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린튼 목사가 개척한 성약장로교회의 현 담임 심호섭 목사는 “한국인들로서는 오래도록 기억해야 될 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인교회뿐 아니라 린튼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한인 목사님도 많다”고 했다.

송상철 목사(새한장로교회)는 “한번 식사 대접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였는 데 돌아가시게 되어 너무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라며, “새한장로교회 설립을 도와주시고, 자주 오셔서 설교도 해주셨다. 특히 유스그룹 초기에 여러 번 설교도 해 주시고 영어 목회자 구하는 것을 도와주셨다. 제일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신현국 목사(주빌리장로교회)는 “1885년 유진 벨 선교사님이 한국에 들어오신 후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밀알이 되신 분”이라며 “교단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인사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추모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믿는 사람들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근태 목사(애틀랜타성경대학 학장)는 “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닮은 분으로 우리교회에도 많이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고 회고했다.

2005년부터 약 2년 간 오픈도어커뮤니티처치를 담임했던 빌리 박 목사는 “2세를 위한 길을 내 주셨던 분이었다. 오픈도어처치를 개척하시고, 신앙의 유산이 한인 2세에게 이어지길 원하셨다”고 말했다.

송희섭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는 칼럼을 통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 분의 삶을 알기에 존경을 아끼지 않았고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며 “인도아 목사님은 우리교회에서 10주 간 성경을 가르치셨다.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보다도 평생을 성실하게 사신 그 인생의 무게에서 더욱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다.

송 목사는 “성경공부를 할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나셔서 한국에서 사신 분이기 때문에 익숙한 한국어지만 나이 관계로 말이 막힐 때가 있었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단어를 찾아내려고 이마를 찌푸리며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며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거들어 줬다. 그러면 활짝 웃으며 ‘Very good very good 여러분들이 나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그 표정과 제스처를 잊지 못할 만큼 따뜻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