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에 이어 5.1 애틀랜타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2년 5월 1일 애틀랜타 다운타운 애틀랜타 대학 센터(AUC) 내에서 벌어진 흑인 학생 시위가 폭도로 변하면서 인근 한인 식품점과 주류점이 약탈 당하고 업주들과 그 가족의 안전이 최악의 상황에서 그 한인들이 경찰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틀 사이에 식품점 2개 점포, 주류점 3개 점포, 의류점 1개 점포가 약탈을 당해 30만 달러의 피해를 당하는 사태가 애틀랜타에서 일어났다.

애틀랜타 다운타운 모어하우스 대학, 클라크 애틀랜타 대학 등 흑인 대학이 밀집한 대학촌 AUC에서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던 학생들이 폭도로 돌변하여 노광준 씨 소유의 파이브스타 주류점과 박상수 씨 소유의 파이브스타 식품점에 난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광경이 TV로 생방송되어 애틀랜타 한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개할 수 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사태 당시 박상수 씨와 노광준 씨는 오후 4시부터 문을 닫고 박씨 점포 2층 사무실에서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시위대가 먼저 주류점 쇠창살을 부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박상수 씨 등은 이 사실을 911에 긴급 전화를 하였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주류점을 약탈하고 시위대는 식품점으로 옮겨 재약탈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식품점의 철제 거라지(Garage) 문을 부수고 진입하여 식료품과 담배, 캐쉬 레지스터를 털었으며 네 차례나 불을 지르려 하였다.

박상수 씨 점포 2층 사무실에서 계속 911에 신고하였으나 경찰은 여전히 응답이 없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박씨 부부와 노씨는 마침 공사를 위해 준비한 나무토막 등이 있어 쫓아온 폭도들에게 던지며 방어를 하였고, 이 때 박씨 부인은 폭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옥상 위에는 경찰 헬기가 떠있었는데, 헬기에서 폭도들을 향해 최루탄을 던짐으로써 폭도들이 퇴각하였고 박씨 일행은 스와트팀(SWAT Team)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7년이 지난 1999년 2월 말 박상수씨와 노광준씨는 애틀랜타 시로부터 30만7천5백달러의 배상금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93년 소송을 제기한 이래 6년의 긴 세월이 지난 가운데 연방법원에서 애틀랜타 시와 피해자들이 타협점을 찾을 것을 명령하였고, 애틀랜타 시가 심적 충격과 사업 지장에 대한 보상액으로 상기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고 또한 1992년 흑인 폭동 당시의 시장인 메이나드 잭슨(Maynard Jackson)과 1999년의 시장인 빌 캠벨(Bill Campbell)의 사과편지를 피해자들에게 주는 조건으로 타협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