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폭동 발발과 그에 대한 대책활동

로스앤젤레스에서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5월 1일에는 애틀랜타에서도 흑인 폭동이 일어나 한인 상점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1일 애틀랜타 대학 센터(AUC) 내 데모 와중에서 한인이 경영하는 식품점과 주류점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29 LA 폭동과 5.1 애틀랜타 사태는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건이었다.

(1)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 발발

로스앤젤레스 폭동 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였다. 시미 밸리(Simi Valley)의 한 배심원이 로스앤젤레스 경찰서 소속의 경찰 네 명에게 무죄를 선언하자 소요가 일어났다. 이 네 명의 경찰은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구타하였었다. 1991년 3월3일 저녁에 25세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은 속도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길거리에서 붙잡혔고, 그 현장에서 백인 경찰들에 저항하다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그 구타 장면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에 의하여 비디오 카메라에 잡혔고, 이 장면이 지방과 전국의 텔레비전 화면에 여러 번 반복하여 방영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로드니 킹을 구타한 네 명의 백인 경찰이 기소되어 배심 재판을 받게 되었다. 연일 보도되는 배심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흑인들은 네 명의 백인 경찰에게 무죄를 선언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흑인들은 이러한 재판의 결과가 인종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분개하였다. 미 전역을 커버하는 ABC, NBC, CBS, CNN, TV, 주간지 NewsWeek, Time지, 그리고 LA Times, Washington Post, New York Times, USA Today, 그리고 각 지방지가 연일 보도하여 전 미국이 들끓었다.

먼저 로스앤젤레스 흑인들이 인종 차별에 흥분한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가게에 뛰어들어 불태우는 등 난동을 부렸다. 불행히도 불똥이 한인 경영 가게 밀집 지역에서 발생하여 한인 업주 피해자가 많았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에 의하여 52명이 목숨을 잃었고, 2,38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리고 16,291명이 체포되었고 재산손실액이 10억 달러(약 13조원)에 달하였다. 불에 타거나 약탈을 당한 상점이 총 4,500개나 되었는데, 이 중에 한인이 소유하는 상점은 전체 피해 상점의 50%가 넘는 2,300개나 되었다(중국인이 소유하는 상점은 235개에 불과했다). 한인 상점의 전체 피해액은 4억 달러에 달하였다. 손해를 입은 상점 중에서 3분의 2가 보험을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상점은 쉽게 회복할 수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사우스 센트랄(South Central) 지역이었다. 사우스 센트랄 지역의 한인 상점 761개가 피해를 입었는데, 그 한인 상점 피해액은 1억 5천8백만 달러에 달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 일어나고 일년이 지난 1993년 5월 1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피해 상점의 28%만이 상점을 다시 열었다. 이와 같이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의 피해는 재정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회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흑인 폭동으로 인하여 한인들은 새잔상의 손실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기회의 땅, 약속의 땅이라는 미국이 배신한 것이었다. 미국은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보답을 해주는 사회가 아니었다. 한인들이 갖고 있떤 미국에 대한 낙관적 신념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던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은 명백히 로드니 킹 재판의 결과에 분개한 흑인과 히스패닉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다. 그런데 왜 1992년 4월 29일부터 3일 동안 있었던 흑인 폭동이 한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되었는가? 왜 한인 상점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백인 세력은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한인을 그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명이다.

백인들은 흑인들과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특히 텔레비전과 대중매체를 좌지우지하는 백인세력은 백인에 대한 흑인들의 적대감을 폭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한인들을 희생으로 삼아서 풀도록 오도하였다고 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은 미국 전역의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애틀랜타 한인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틀랜타에서도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긴박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폭동사태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한인 업소는 파이브스타 식품점(상점주 박상수)이었다. 애틀랜타에서는 한인회 산하 안전대책위원회(위원장 이승남)가 구성되었고, 또한 한흑 친선위원회(회장 지형석 목사)가 구성됨으로써 한인과 흑인간의 갈등을 전담하기도 하였다.(한인이민사 1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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