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자 3 개월 동안 많이 배웠어요.

Q: 저 (H)는 동생 (Y)과 함께 무비자로 미국에 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동생은 군대를 졸업하고 대학을 복학하려고 하던 중, 미국에 있는 이모의 초청으로 3개월 미국에 머무르며 미국 경험을 하려고 온 것이죠. 너무도 오랜만에 만난 이모를 공항에서 보고, 너무나 반가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이모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이모와 이모부는 여전히 아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사촌 동생들도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왔고요.

막상 3 개월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우리는 한편으로 여행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어 연수를 하려고 계획했지만, 이모네 가정은 여전히 생활이잖아요? 더우기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문화가 우리의 생각이나 몸에 밴 습관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이모네 어린 동생과 사소한 일로 심한 말다툼도 하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왜 품어주지 못했는가 후회스럽기도 해요. 그 아이의 자유로운 말이 내게 거슬렸거든요… 특히 언니나 오빠한테 존칭어를 쓰지 않은 것이…

영어도 좀더 열심히 배우려고 했는데, 한국 친구와 문화가 그리워서 자꾸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게 되고… 재미있는 한국 비디오를 빌려다가 습관적으로 보게 되고… 3 개월이 훌쩍 지나 이제 미국을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 사실은 정말 한국으로 가기가 싫어요. 한국이 그리웠지만, 미국의 자유로운 삶에 저도 물들었나(?) 보죠. 그래도 내 나라 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지요. 만일 다음에 다시 온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떠나지 않고 살려고 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A: 이것은 저희 조카들의 이야기입니다. 처형의 자녀들이 지난 3 개월 동안 저희 집에 머물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지요. 공항에서 만났을 때 너무나 반나왔고, 공항을 떠날 때 너무도 서운했습니다. 떠나기가 아쉬워 건네준 꼬깃꼬깃 접은 종이 편지에 Q 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비자 기간의 제한만 없다면, 더 머물게 하면서 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형편이 너무도 아쉬었습니다. 이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쓸슬히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카들을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보았던가요? 저희 역시 한국을 떠난지가 오래 되어서 공항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했지요.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활짝 웃으면서 발랄하게 자라 주어서 너무나 감사했어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품에서 잘 자라준 것도 감사했구요. 정말 우리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살면 좋겠다 싶었어요. 한국 소식 들어서 좋았구요. 조카들이 미국 것들에 좀더 호기심과 관심을 갖았으면 하고 바랐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한국의 것들에 더 머무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영어 공부를 바짝 하려고 하거나 미국 드라마나 잡지 등을 보려는 것보다는, 한국 비디오를 꾸준히 보고 틈만나면 한국 친구들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미국보다는 한국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남자 조카 (Y)는 자신은 한국이 미국보다 더 맞는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러다가 떠날 때는 50: 50이라고 하기도 하고…

위의 편지에도 언급되었지만, 저희 딸과 사소한 일로 충돌을 빚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수직적 사고가 미국의 수평적 사고와 충돌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문화의 충돌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제 딸이 먼저 언니에게 말을 걸더군요. 3 개월 동안 서로 불편한 점들도 있었지만, 참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문화와의 차이를 느끼니 저희도 어느덧 어느 정도 미국화 되어 있나 봅니다. 무비자 시대가 되어서 친척 초청으로 이런 일들이 빈번할 것 같아서 컬럼으로 올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