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됨은 미래를 모른다는 것, 그리곤 어떤 일을 경험할지 모르기에 기도하게 되는 유약함이 주안에서 강함이 된다는 사실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죽음이란 과정을 겪을 때면,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것이 사람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의 차이를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에 종속된 시간을 경험하면서도, 본인이 죽을 그때가 언제가 될지 정확히 진단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느 분이 임종 예배를 부탁하시었는데, 부탁하신분의 여러 어려움으로 시간을 잘 못 맞추어서 돌아가신 즉시 뵈러 간적이 있었다. 거의 백세란 긴 인생을 사시었지만, 소천하시는 시간을 못 맞추어서 소천 하시는 당일 예배를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컸었던 적이 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정확한 종지부를 하나님은 아시어도 인간이 안다는 것은 정말 간단치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름을 느껴 본다.

사실, 사람이 인생이란 여로를 가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일들, 즉 언제 병들지, 사고가 날지, 본인은 물론 자녀들에게 어떤 변수가 생길지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불안함은 단지 본인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혹은 아내와 자녀들까지 합친다면 변수라는 함수는 기하급수적이다. 이런 것을 모르지 않는 부모의 입장에선 그렇게도 기도가 많이 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 한다. 그런 면에서 수 없이 많은 어머니들이 새벽이면 교회당에 나와서 손자 손녀까지 기도하지 않으면 하루가 불안하고 갑갑하신 것 같다. 그만큼 자식들을 사랑하고, 역시 인생이란 여로를 통해서 이러 저러한 변수들의 여울목을 지나오신 분들이기도 하다. 즉 인간이란 한계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기도로 미지의 변수가 임하지 않도록, 변수라는 함수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애씀과 인간의 노력이 기도로 나타남은 역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선 기도가 보편행위로 이해되기도 한다. 즉 기도와 종교는 언제나 뗄 수 없는 관계로 빛과 그림자처럼 늘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가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보면, 신앙으로서 기도행위가 꼭 이해관계와 같은 변수의 줄임이라는 일차원 적인 행위일까 질문해 보게 된다. 이런 행위는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도 본성으로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기도행위를 다 무시 할 순 없지만, 즉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 성도의 기도 주님이 들으시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금은 성숙한 성도라면, 삶의 과정에서 원치 않았던 고통이라는 변수를 만나게 됨이 언제나 나쁜 것으로 본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은총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고통에서 얻는 성화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글쎄, 이런 생각은 어떨까? 성도의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호흡이란 사실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라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의 수단으로 기도를 주심이 너무도 감사할 뿐이다. 아울러 주님과의 사귐이 있도록 하심이 성도만이 갖는 특권이다.

어느 사모님이 소천하기 직전에 무릎을 끊고 기도하시면서 주께 모든 것을 의탁하시고 가신 것을 듣게 되었다. 소천하시기 약 한 시간 후에 도착했지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도 영원한 사귐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 성도의 안식과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너무도 차이가 있지만, 말하자면 전도서 3장의 말씀처럼,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라는 말씀처럼 인간의 때와 사람의 때의 차이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은총의 간격이 됨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인간이 계측할 수 없는 은혜의 신비로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치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