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제(S)가 한국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저는 목회 모델로서 대형 교회의 목사님들을 생각했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온 많은 목회자들이 있으실텐데,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서 다른 분들보다 더 큰 교회를 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식 기도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 보기도 하고, 말씀의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지 못했고, 지금 저는 목회자로서 제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도 갖고 있습니다. 목회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도 생기며, 점점 마음이 우울해지고 착찹해지기도 합니다. 나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왜 나는 이렇게 무력한 마음이 드는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에 나가서 마음껏 살고 싶습니다. 제게 조언의 말씀을 주실 수 있나요?


A: S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도 마음에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몇 주 전에 쓴 <부르심의 소망을 찾으세요> 라는 상담 컬럼에서,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를 다루었습니다. 목회자는 한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종인데, 때때로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여전히 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성으로 말미암는 인간적 한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경계선 상에 서 있는 목회자는 한편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자면, S 님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요, 남편이면서 교회에서는 목사님이시지요.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각종 utility bill를 내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정을 꾸려 나가기도 하시죠. 교회에서는 예배를 인도하시며 설교를 하시고, 성경 공부와 기도회도 인도하시고, 그 밖에 성도들도 상담해 주시고 여러가지 교회와 관련된 일들에 관여하시겠지요.

이렇게 목회자의 삶이 분주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조급해지고, 다른 목회자나 교회와 비교하게 되면서, 교회의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S 님께서 목회 초창기에 목회 모델로서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님들을 염두에 두게 되셨다고 했는데, 그 방향성이 조금 빗나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약 10 여년 전에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빌 목사님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한 영혼을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지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물론 문화적 차이와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이 불변의 진리일 수는 없겠지만, 크고 아름다운 전나무 숲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은, 우선 한 그루의 전나무를 세심하게 그려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빌딩을 짓기 위해서 하나의 벽돌을 든든하게 쌓는 작업부터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목회의 방향을 외적인 성장에 두기 보다는 한 영혼의 내면적인 삶에 맞추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목회자 자신의 성향과 기질과 신학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제가 광야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하면서 한 영혼의 내면적인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성도들의 하나님과의 1:1의 관계를 강조하다보니, 성도님들의 삶의 방향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목회의 길은 참으로 장거리 경주인 것 같습니다. S님,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시느라고 많이 지치셨지요. 조금 쉬어 보세요. 그러면 다시 힘을 얻을 겁니다. 엘리야와 같이… 그때 다시 뛰어 보세요. 그때는 예수님과 함께 말이예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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