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인회의 다양한 활동

1990년대 들어서 수행한 한인회 활동은 비록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몇 권의 책으로도 전부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이러한 활동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이 책의 분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 되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절에서는 한인회 활동 중에서 몇 가지 사례만을 들어 기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한인회 활동들을 몇 가지 유사한 활동으로 묶어서 그 중에 하나의 사례를 택하여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제 2부에서도 한인회 활동을 시계열적으로 나열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1) 정기총회와 송년회

애틀랜타 한인회 정기 총회는 연말에 송년회와 더불어 개최되는 경우가 많았다. 애틀랜타 한인회 정기 총회에서는 흔히 애틀랜타 총영사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정기 총회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송년 파티가 열려 여흥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는 1992년 말에 개최된 한인회 정기 총회 겸 송년회 사례를 주간동남부 1993년 1월 5일자 기사를 인용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경제 불황과 한흑 마찰의 증촉이라는 악 조건 속에서 보낸 1992년을 결산하고 대망의 1993년 계유년을 맞이하는 애틀랜타 한인회의 1992년 정기 총회 및 송년회가 1992년 12월 27일 한인 타운 백도 가든에서 약 400명의 한인들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오후 6시 저녁 만찬으로 시작된 이 날 송년회는 총 2부에 걸쳐 정기 총회 송년 파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병만 한인회 사무총장 사회로 열린 제 1부 정기총회는 이진희(7세) 어린이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 모두가 기립한 채 한마음으로 애국가 및 미 국가를 봉창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내빈 축사, 한인회 집행부의 합창 공연, 포상 및 감사패 수여 등으로 이어졌다.

손칠영 한인회장은 송년사에서 “1992년 한해는 LA 및 애틀랜타 흑인 폭동사태 등으로 한인 이민 사회가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은 해였다.”고 평가하고, “소수민족인 우리는 목소리를 하나로 합칠 때만이 미국 사회에 크게 울려 퍼질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1993년에도 한인 사회가 변함없이 단합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 권영민 총영사는 허덕행 영사가 대독한 축사를 통해 다사다난했던 지난해의 어려움을 극복해 온 한인 사회와 한인회의 슬기를 치하하고, “우리는 모국의 문민 대통령 탄생과 함께 민주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자 미국과 일곱 번째의 교역 대상국으로 발전해 왔으므로 한민족으로서 긍지를 갖고 조국의 국위 선양에도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특히 이날 총회에서는 나광수 총무부장의 업무 보고와 이규갑 재정부장의 재정 보고가 끝난 후 한인회 집행부 및 이사회 가족 일동으로 구성된 한인회 합창단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무대에 나와 ‘오빠 생각’ ‘옛날은 가고 없어도’ ‘고향의 봄’ 등을 불러 청중을 흐뭇하게 하였다.

이어 실시된 1992년 포상 및 감사패 수여식에서는 3년 전 교통사고로 남편을 여의고도 시부모를 봉양함은 물론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워 온 곽여식 여사(잡화 도매점 헤브론 운영)가 효행상을 수상하였고, 지난 3년 간 노인회 경로 잔치를 베풀어 온 진우회(회장 차영호)가 선행상을 한인봉사센터 김채원 총무, 한인감리교회 박성용 목사, 주간동남부 임재현 취재부장이 사회봉사상을, 그리고 한인회 발전에 기여한 박영남, 양용삼 이사 및 최영식 씨, 장병건, 이판봉 옹 등이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와 함께 은종국 씨를 비롯하여 8명의 한인과 단체가 손 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증정받은 한편, 한인회 부회장 겸 안전대책위원회를 맡고 있는 이승남 위원장은 디캡 카운티로부터 명예 보안관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제 2부 여흥 순서에서는 손 회장 부부 및 권 총영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한인들이 노래 잔치에 참여하였고, 가장 관심을 끌었던 한국 왕복 항공권 복권 추첨에서는 캔들러 후리마켓(Candler Flea Market)에서 여성 의류점을 운영하는 김혜령 씨가 당첨되는 행운을 안았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한인회 측은 당초 예정 인원을 200명 내지 300명으로 잡고 음식을 준비하였으나, 예상 외로 400명이상의 인파가 몰려 일부 한인으로부터 ‘행사장이 비좁다’는 비난을 받는 등 곤혹을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