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LA에서는 남편과 가정불화를 겪어온 것으로 알려진 50대 한인여성이 남편이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분신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이 같은 자살사건은 날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실제 LA 카운티 검시소는 지난 8개월간 한인 23명이 자살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는 한인 사망자 3명 중 1명꼴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음을 뜻한다. 또한 뉴욕 및 뉴저지의 경우 올 들어 자살한 한인만도 40여 명으로 이는 예년 보다 무려 4배 이상 높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지속적인 장기불황에 가정불화 등이 더해지면서 생활고와 처신을 비관하는 한인들이 늘어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은 지난주 통계청이 발표한 08년 사망자 통계에서 한 해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무려 1만2858명으로 전년 대비 684명이나 증가한 것으로 보고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지난주 보고서에서 전 세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연간 100만 명을 넘어섰다며 자살의 급증세를 경고한 바 있다.

이렇듯 날로 증가세를 보이며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자살’을 주제로 ‘성경이 말하는 자살’이라는 글을 최근 기고해온 김호 목사(나성중부교회)는 자살은 분명 악한 것이지만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며 남은 자들에게는 사랑의 빚만이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일부 내용을 인용한다.

『 ‘자살은 지옥이다’라는 것이 전통적인 성경관점이다. 여기에 대해 ‘자살은 사고사다!’ 하면서 진보적인, 도전적인 이론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한 현상이다. 자살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성경에도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사울이 전쟁에서 지고 할례 없는 이방인들의 손에 의한 모욕적인 죽음보다 자기 스스로 자살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자결한 기사가 사무엘상 31장에 나오고, 아비멜렉이 70명의 이복형제를 죽이고 정권 잡아 3년 전쟁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윗짝에 머리 맞고 죽기 전 병기 잡은 소년에게 자기를 찌르게 했다. 쌓은 죄, 쌓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사사기 9장에 기록되어있다.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을 도운 아히도빌은 자기의 모략이 실패하자 나귀타고 고향에 돌아가 목메어 죽었고, 술 취한 임금을 쳐 죽인 시므리는 집권 7일 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오므리로 왕을 삼자 포위당한 왕궁에 불을 놓아 그 불 가운데서 타 죽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양심가책으로 돈을 반환하고 괴로워하다가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서 목메어 자살했다.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는 자살은 언제나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정의하면서 자살은 때로 희생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전우를 구하기 위해서 수류탄을 안고 죽고, 물에 빠진 사람 건지기 위해, 술 취한 사람 위해 열차에 뛰어들고, 생명 구하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들고.. 이것들은 저주받을 죽음이 아닌 희생적 의로운 죽음이다. (반대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자살의 예외적인 희생적인 자살 등을 전혀 인정치 않았는데 성경적인 근거로 신명기 32장의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다 한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자살이 어떤 정당화, 동정화, 윤리적으로도 시인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우리는 자살을 저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생명의 심판자가 아니다. 또 자살을 부추기는 환경에 대한 간접적인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한편 ‘잔인한 몇 월’ 등으로 표현되며 매년 되풀이되는 한인사회의 자살소식에 교계 차원의 뚜렷한 신앙지침이나 대사회적 대책 마련이 전무한 상황이라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