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아주 끔찍한 대형 사고가 났다.
차 안에 있던 수십 명이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들이 천국 문 앞에서 베드로를 만났다. “와, 베드로 할아버지, 반가워요”
“네, 환영합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우리는 모두 천국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지요?” “우린 부르클린에서 왔는데 모두 한꺼번에 죽었어요.”

베드로가 대답했다.
“와, 너무 반가워요! 지금까지 부르클린에서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요.
하나님께 이 소식을 말하고 올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걱정 마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기뻐서 즉시 이 사실을 하나님께 보고했다.
하나님도 깜짝 놀라하시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으로 초대하라고 하셨다.
베드로도 기뻐하며 천국 문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잠시 후 베드로가 숨을 헉헉거리며 하나님께 뛰어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모두, 모두 없어졌어요.”
“없어지다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없어졌다고?”
“아니요, 문이요, 천국 문이요.”
부르클린에서 온 일단의 무리들이 천국 문을 훔쳐간 것이다.

비록 가상의 이야기지만
뉴욕 부르클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화이다.
부르클린은 마약 거래와 강도, 빈민가로 유명한 흑인동네이다.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천국예배의 모형

지난 8월 마지막 주일에 바로 이 도시 중심가에 있는
부르클린 테버네클 교회를 찾아갔다.
담임 목사 짐 심발라가 1972년에 바로 이 도시에서 가난,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매춘, 인종 차별 등의 문제에 빠져있는 이들을 위해 시작한 교회이다.
현재 1만 명이 넘는 미국 10대교회로 성장했다.
방문해보니 전용주차장도 없고, 교회 문 바로 옆 상점에서 담배와 술파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세상 속의 교회였다.

본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 뮤지컬 극장 분위기의 실내는
이미 수천 명의 회중으로 앉을 자리가 없었고,
무대는 찬양인도자와 함께 150여명의 콰이어가 전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70%이상이 흑인이었고, 남미, 중동, 동양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미상을 6번이나 수상한 바 있다는 브룩클린 테버네클 콰이어의 영감 있는 찬양과
예배인도자의 뜨거운 열정, 인종을 초월한 회중의 너무나도 자발적인 반응으로
예배는 한 마디로 뜨거웠다.

보통 흑인교회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부흥회 스타일의 거친 멘트와
가스펠 찬양과는 종류가 달랐다.
워십리더의 하나님을 향해 절제된 선포와 고백에 회중은 지체 없이 반응했다.
아니 반응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지휘 아래 회중, 워십리더, 콰이어 모두가
예배의 선수가 되어 함께 반응하고 함께 예배를 인도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가득한 천국의 모형을 보는 듯 했다.

친밀감에서 나오는 존재의 힘

이 교회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예배를 연구하고 자료를 모으는 전문가로서 첫 방문 시 자연스런 반응은
예배 흐름을 분석하고, 순서의 연결, 음향과 조명, 회중의 참여도,
인도자의 태도, 음악 등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예배실에 들어서자마자 경험한 예배의 열정과 깊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되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장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와 내 존재가 맞닿았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내 전 존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반응했고,
충만한 경외감으로 깊은 경배로 들어갔다.
그 경배의 깊이를 어찌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짐 심발라 목사의 메시지는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우리도 예수님께로부터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 나누듯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왔다.

메시지 후 세상에 보내시는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을
앞으로 초청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내 몸은 이미 단 앞을 향하고 있었다.
백여 명의 헌신자들과 함께 서서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했다.
“I Surrender All. I Surrender All." 억지로 자신을 드리는 항복이 아니라
그분의 넘치는 사랑과 풍성하신 은혜의 폭포수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고백이었다.
최근 씨름하던 문제에서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고
주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순종의 결단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는데 바로 코앞에
짐 심발라 목사가 헌신자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께 직접 안수를 받으려고 움직이지 않았고,
짐도 그저 눈을 감고 평온한 모습으로 앞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문득 이 분의 능력은 어떤 인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본질적인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일 안 좋은 예배는 예배인도자, 연주자, 설교자가 드러나는 예배이다”라고
자신이 말한 그대로 예배인도하고 있지 않은가?
가만히 서있는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능력, 그것이 존재의 신비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다.(I am who I am, 출 3:14)
아무도 그분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하지 않지만 오직 그분이 갈망하시는 것은
자녀인 인간과의 사랑이다. 공의와 사랑이 그분의 속성이기에 그 존재 앞에
서 있는 우리 예배자는 그분의 속성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배는 끝났지만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을 직면한
자아 깊은 곳에 존재의 충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2시간이나 흘렀다. 예배 2시간이 이토록 짧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내 전 존재를 하나님께 반응하고, 그분 앞에 내어드린 근래 드문 예배체험이었다.

이날 경험한 그분의 임재의 영광은 그 이후 내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내 태도와 마음의 변화이다.
성격차이, 기호, 스타일, 내 주장 등과 같은 의사소통의 방해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신뢰, 존재의 가치, 내면, 사랑 같은 관계의 본질에 더 마음이 간다.
하나님의 속성이 삶 속에 능력으로 녹아드는 경험이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그래서 존재의 변화는 단 한 번의 예배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