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 목사는 남가주밀알선교단이 선정한 장학생 중 유일한 목회자였다. 그가 미국 땅을 밟은 것 불과 4개월전. 풀러신학교 선교 목회학 박사 과정 공부를 위해 미국을 찾은 김 목사는 뜻하지 않게 남가주밀알선교단과 인연을 맺어 장학생이 됐다.

“공부하러 미국까지 왔다가 이렇게 장학금까지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이게다 공부 많이해서 주님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인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해서 복음을 널리 전하고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김 목사는 소아마비 지체 장애인이다. 그가 처음 소아마비를 앓게 된 건 기억조차 없는 두살때. 그러던 중학교 시절 한 전도사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다.

“전도사님을 통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어요. 전도사님은 폐병으로 힘들어 하시면서도 몸이 불편한 저를 업고 예배에 참석하셨는데, 저의 부족한 믿음과 연약한 육신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셨죠. 등 뒤로 고통스럽게 기침하시며 기도하시던 전도사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김 목사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은 것은 신일고등학교 미션스쿨에서 영적체험을 하고 난 뒤다. 그는 정통적인 장로교 예배와 설교를 통해 믿음이 성장했고 교목의 추천을 받아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학부와 신대원 그리고 대학원 공부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훈련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전도사로서 교회를 섬기며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연단을 쌓았고, 특별히 기숙사에서 믿음의 친구들과 나눈 우정은 지금도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1993년 4월 26일 김 목사는 새로 태어났다. 이 날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김 목사는 목사 안수 받은 후 홀트아동복지회와 에덴하우스 등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장애인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IMF 이후 10년 동안 노숙인들을 섬기기도 했고, 복음이 사라진 북한 땅을 방문할 기회를 주셔서 북한의 장애인 어린이를 돌보는 남북장애인협력단에서도 일했어요.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부서를 만들면서 장애를 가진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일구고자 했던 추억도 있어요.”

김 목사는 장애는 삶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한 때 부끄럽게 여기고 감추려고도 했지만 요한복음 9장 3절 ‘장애’는 죄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12장 26절, 27절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여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 가운데 힘을 얻었어요.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한 사도 바울을 본받아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