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 (전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
(Photo : 기독일보) 김재성 교수(전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

로마 가톨릭에 구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성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던 종교개혁자들을 향해서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다. 트렌트 공의회 (1545-1563)에서 선언한 그대로를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는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담겨야만 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하나님의 형상으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이 마음인데, 참된 지식이 작동하는 인격의 중심이 되는 곳에 믿음이 담겨있으면 구원에 이른다 (엡 4:24, 골 3:10).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은 사람의 지식이나 영특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다 (고전 12:3).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값없이 자기에게 속한 양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다 (엡 2:8).

그러나 모든 우상 숭배자들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 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범죄가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을 받드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나라에 있던 우상의 유혹에 미혹되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았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사람이 가장 좋아하고 매달리는 것들은 모두 다 우상에 해당한다 (롬 1:23-25). 인간의 양심은 영적인 흑암 속에 놓여 있어서, 우상의 속임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다. 먼저 마리아 동상 앞에서 절하고 소원을 빈다. 온갖 성자들의 신통력을 믿는 기적 신앙과 미신들도 팽배해 있다. 마리아 동상에서 실제로 피가 흘렀다는 괴담들을 실제로 일어난 기적이라 믿으면서, 그곳을 찾아가는 자들이 매년 수 백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도, 스위스에서도, 남미에서도 마리아 동상의 기적들이 널리 퍼져있다. 이런 비슷한 사례들이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가져온 물이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들도 많다.

1. 미사와 화채설의 허구성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구원에 관한 교리들은 성경의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교훈들을 왜곡하고 있다. 가장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가짜 교리가 미사이다.

종교개혁의 신앙을 계승하는 현대 복음주의 개신교회에 소속해 있는 대다수의 성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참된 예배와 얼마나 다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례와 성찬예식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정확히 분별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미사와 성만찬에서의 화채설은 허망하고도 무익한 종교적 의식일 뿐이다.

가톨릭의 미사는 성직자에 의해서 집례되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반복적 행위이다. 제단 위에서 성직자들이 집례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피없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부분이다. 미사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피없는 제사”는 전혀 성경에 없는 것이다. 희생 제사를 보조적으로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설교이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설교가 자신들의 본질적인 임무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미사를 폐지하고, 말씀의 설교를 가장 중심에 두는 순서들로 예배의 내용들을 완전히 바꾸었다.

미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부분은 합당한 희생제사이고, 다른 부분은 성만찬이다. 희생제사라는 부분은 오직 성직자만이 수행하며, 그들만이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 거룩한 성만찬에서 성직자의 축원이 있은 후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환된다고 가르친다.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요, 미신적인 신비주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들 (세례, 성찬, 고해성사, 견진, 임직, 결혼, 종부성사)만을 반복하고 있다. 과연 성경 어디에 예수님이 이런 일곱 가지 예식들을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그러한 일곱 가지를 시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없다. 오직 두 가지 세례와 성찬뿐이다.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로 나가서 전파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리고 말씀하셨다 (마 28:19-20). 주님께서는 세례와 성찬만 친히 시행하셨고, 명령하셨다.

미사(the Mass)의 핵심에는 “피없는 희생 제사”와 이를 매번 제단에서 주관하는 “제사장”(성직자)이라는 개념이다. 모두 다 성경과 초대교회에서는 없던 것들로, 중세 시대에 만들어낸 것들이다. 미사는 “화채설”에 근거해서 베풀어지는 성만찬이 핵심인데, 성경과는 전혀 다른 관행에 따라서 진행하는 “우상숭배적인 예배 의식들”(idolatrous practices)이다.†普 성직자 제도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연계되어 있는 미사와 성만찬 교리는 전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교리들이다. 화채설을 선포하는 성직자들의 중요한 역할과 권위을 강조하는데, 그것도 역시 성경의 교훈을 완전히 변질시킨 것이다.

湯慴 Bavick, Reformed Dogmatics, IV:572.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항상 새롭게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반복하는데, 이것을 대행하는 자가 성직자들이라고 로마 교회는 가르친다. 미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참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희생하는 제사를 드리는데, 성직자들에 의해서 “피가 없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혜택들이 교회와의 교통을 나누는 자들에게 제공되어진다고 가르친다.†普 미사에 참석하여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자들에게나 또는 그 자리에 없더라도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주어진다. 영적으로 필요한 것이나 육신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채워주시는데, 죄의 용서, 질병과 사고로부터 보호, 기근과 홍수와 전쟁과 전염병으로부터의 강력한 보전 등이다. 이것을 성만찬에서 나눠주는 것을 받아서 성도의 몸 안에 은총을 주입하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가르친다.

湯慴 Council of Trent, sess. XXII, can. 1.

미사는 성경에 전혀 없는 거짓된 교리들로 포장된 가짜 예배행위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주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배로 위장한 미사와 성만찬 교리의 반성경적 본질을 밝혀낸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온갖 핍박과 탄압이 가해졌다. 루터, 멜랑히톤, 츠빙글리, 칼빈, 피터 버미글리, 베자, 낙스, 윌리엄 에임즈 등은 미사와 성만찬 교리 속에는 교모한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普

湯慴 John Wyclif, On the Eucharist, in Advocates of Reform: From Wyclif to Erasmus, ed. Matthew Spinka (Philadelphia: Westminster, 1953), 82. Keith A. Mathison, “The Lord’s Supper” in Reformation Theology, 647.

종교개혁자들은 미사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파악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과 인내의 최종 결정체는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서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 후로 더 이상의 희생제사는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용서를 받은 성도들이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것을 풀이하는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받으면서,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고 찬양과 경배를 표현하며, 겸손히 기도를 올리는 것이 참된 예배의 본질이다.

2. 구원론의 왜곡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에는 왜곡된 여러 교리들이 뒤엉켜 있다. 성례를 통한 은혜 주입설, 공로주의 사상, 이중 칭의론 등 여러 교리들이 맞물려 있다. 로마 가톨릭의 총체적인 문제점은 성도가 선한 행위로 공로를 쌓아야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의 판정을 얻게 된다는 “신인협력설”(synergism)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교리의 기초에는 인간론의 왜곡이 자리하고 있는데 “유사 펠라기언이즘” (semi-pellagianism)이라는 사상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인간론과 구원론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구도로 고착되어 있는데, 아퀴나스가 강조한 일곱 가지 성례론의 핵심에 있는 “은혜주입설”(gratia infusa)로 포장되어 있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다시 선행의 여부를 심판한 이후에야 의인이 된다는 “이중 칭의론”을 가르친다. 결국, 교회와 성직자가 구원의 적용과정을 장악하고 있다.

1) 은혜주입설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성례를 통해서 “은혜”가 “주입” 된다는 교리를 재차 선언했다. 이 모임은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에 대해 논박하기 위하여 소집된 것이다.

트렌트 선언서에 담긴 은혜의 주입이라는 교리는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교리로 강조되어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힘을 주입하신다. 머리로서 몸의 지체들에게 주듯이, 그리고 포도 나무가 가지들에게 공급하듯이, 이 힘이 항상 흘러나오며, 수반되어서, 그들의 선한 행위가 뒤따르게 된다.”†普

湯慴 Dogmatic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ess.6, chap. 16.

얼핏 겉모양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요한복음 15장 1-1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을 근거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트렌트의 교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의 왜곡이 확연히 드러난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들의 머리에게 지체들로서 연합한다.

따라서 머리로부터 힘이 나와서, 몸의 다양한 지체들이 존중을 받는 기능을 합당하게 수행하게 된다. 주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부터 신성한 은혜와 덕목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로 확산되어 나간다. 기독교인의 경건의 모든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을 채워주는 것이다.”†普

湯慴 Catechism of the Council of Trent, tr. John A. McHugh and Charles J. Callan (Rockford: Tan Books, 1982), 188.

ஸ트렌트의 교리지침에 따르면, 세례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성령은 죄인들을 중생시키며, 새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모든 은총의 투여가 세례라고 하는 성례를 통해서 효력이 작동한다 (ex opere operato)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 선언에 따르면, 성직자들에 의해서 실시되는 세례란, 믿음과는 다른 것이며, 그리스도에게로 결합시킨다. 개인에게 시행되는 세례에서 물을 부어주는데, 사람이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갖추게 되는 여러 가지 덕목들, 믿음, 소망, 사랑이 주입된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덕목들을 세례를 받으면서 주입받은 자가 믿음으로 더 의롭게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은총의 주입에 의해서, 오염과 죄의 힘을 차단하고 근절시키게 된다고 가르친다.

트렌트 선언에 따르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인간의 선행과 협력적인 노력이 없으면 최종적 칭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 따르고자 했다. 루터는 로마 교회의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라서, 사람이 선한 행위를 실현하더라도 도저히 죄인의 사악함을 벗어날 길이 없음을 오랫동안 고뇌하였다. 그는 마침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다는 교훈을 터득했다.†普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죄인들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이라고 종교개혁자들은 믿었다.

湯慴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1535), Luther’s Works, 26:129.

은혜 주입설을 결의한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는 자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신다는 교리를 극렬히 반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성례를 통해서 각 사람에게 은혜가 주입된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을 거부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이 은혜 주입설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말씀을 강조했다. 특히, 로마서 4장 3절에“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하였다.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간주하신다”(faith is credited righteousness) 혹은 “여겨주신다”는 헬라어 “로기조마이”가 모두 아홉 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반론에 대해서 저주를 선언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오직 전가됨으로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거나 죄의 용서가 주어진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트렌트 공의회는 “저주”(anatema!)를 선언했다.†普 의롭게 되려면, 은총의 주입이 있어야 하고, 사람의 협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선행이란 칭의를 얻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칭의를 얻은 자들에게서 나타나야할 열매이자, 표식이라고 해석했다.

湯慴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ess. 6, chap. 7, 16.

로마 가톨릭의 저주선언은 허수아비처럼 그저 들판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진 것이 아니었다. 트렌트 공의회 참석자들은 루터를 비롯한 당대 종교개혁자들과의 논쟁을 했었기에, 출판된 저서와 논문과 설교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칭의 교리는 근원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해온 로마 교회의 전통만을 집요하게 옹호하려는 했기에,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들은 전통적 교리와 관습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수정할 기회를 짓밟아 버렸다.

트렌트 선언서에 담긴 가장 중요한 오류에 대해서 칼빈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 사이에 협력적인 작업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普 트렌트 선언이 발표된 지 이 십연 후에, 루터파 신학자 마틴 켐닛츠도 칼빈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켐닛츠은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의롭게 하다”(justify)라는 라틴어 단어를 “의롭게 만들다” (to make righteous)라고 이해하였기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성도에게 내재적인 의로움을 질적으로 주입해야만 하고, 그 후에도 의로움의 행위가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普

湯慴 Calvin, Canons and Decrees, Selected Works, 3:113-6,

湯慴 Martin Chemnitz, Examination of the Council of Trent, tr. Fred Kramer, vol. 1, Sacred Scripture, Free Will, Orininal Sin, Justification, and Good Works (St. Louis: Concordia, 1971), 579-80.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의롭게 하다”는 단어를 히브리어 원어에서 표현하는 방식대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 받아서 죄악들로부터의 형벌을 면제받거나, 또는 죄의 씻음으로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신다는 히브리어식 표현을 심도있게 설명하면서, 헬라어 고전들에서도 역시 동일한 표현법으로 사용되었음을 켐니츠는 소상하게 제시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루터파 신학자들이 1999년에 칭의교리에 대한 공동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普 제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가 앞장서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면서, 신학적인 차이점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신학자들이 공동선언서를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루터파 신학자들이 루터의 문장을 인용하여,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풀이하는 구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기독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문서를 만들었지만, 전세계 기독교 교회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이 공동선언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했던 것을 취소하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종교개혁의 종말”을 끈질기게 권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普

湯慴 The Lutheran World Federation and the Roman Catholic Church, 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0).

湯慴 Matthias Gierth, “A Time to Embrace,” The Tablet (November 20, 1990), 6.

2) 신인협력설과 자유의지론

로마 가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협력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신인협력설의 출발점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한 이후에, 하나님의 은총이 덧입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을 때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죄로 인하여 손상은 입었지만, 완전히 부패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인이 수용을 하든지, 거부를 하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개혁신학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반박한다. 자연적인 인간은 하나님께 적대적이며, 반항적이라는 가장 먼저 지적했다. 그 어떤 사람도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의지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 (롬 1:18-25). 아담의 타락 후, 원죄의 영향을 입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서 영적인 무능력과 절대적 부패상태에 놓여있다.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는 은혜를 베푸셔야만 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를 올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의 단독사역이며, 그 은총은 거역할 수도 없고 취소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유사 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를 표방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와 원죄로 인한 전적 부패를 거부한다. 인간이 먼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거나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 뒤에 덧붙이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문제점은 아직 선한 영역이 남아있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자발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자연적 인간의 본성이 자유의지를 발동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중심적 사상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인물이 펠라기우스 (Pelagius, 355-420)였다.†普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영국 출신으로 로마에 머물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게으름과 부도덕을 목격하였다. 그는 로마인들의 방탕을 목도하면서, 스스로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개선의 노력하라고 설교했다. 신생아가 태어날 때에는 전혀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로 무흠한데, 차츰 다른 사람들의 죄를 모방하면서 불의한 자가 된다고 가르쳤다.

湯慴 Peter Brown, "The Patrons of Pelagius: the Roman Aristocracy Between East and West,"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21-1 (1970): 56–72.

그의 신학에 담긴 오류에 맞서서,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한 초대 교부가 제롬과 어거스틴이었다. 특히 어거스틴은 418년 칼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의 신학을 정죄했고,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도 역시 이단적이라고 판정했다.†普 어거스틴은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에서 빚어진 영향으로 인해서 죄의 오염상태에 놓여있으며, 도덕적 죄책을 물려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가 영적인 선과 구원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普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은 529년 제2차 오렌지 공의회에서 다시금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湯慴 Eugene Teselle, (2014). "The Background: Augustine and the Pelagian Controversy," in Grace for Grace: The Debates after Augustine and Pelagius, eds., Alexander Y. Hwang, Brian J. Matz, Augustine Casiday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4), 1–13.

湯慴 Stuart Squires, The Pelagian Controversy: An Introduction to the Enemies of Grace and the Conspiracy of Lost Souls (Eugene: Wipf and Stock, 2019). Burton L. Visotzky, "Will and Grace: Aspects of Judaising in Pelagianism in Light of Rabbinic and Patristic Exegesis of Genesis," in The Exegetical Encounter Between Jews and Christians in Late Antiquity. eds., Emmanouela Grypeou, Helen Spurling (Leiden: Brill, 2009), 43–62.

지금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서는 인간 의지를 중요시하는 “유사 펠라기언이즘”을 따르고 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간의 본성이 약해지고 영적으로 병든 것은 인정하지만, 도덕적 약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선을 선택하고 믿음을 시작할 수 있는 자유의지 자체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구원에 이르는 자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먼저 스스로 구원을 원하고 믿음을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 의지를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을 완성하신다고 가르친다.

3) 선행과 공로주의

트렌트 공의회는 칭의를 가르치면서도 “단순히 죄의 씻음만이 아니라, 은총과 은사들을 자발적으로 받음으로써 성화와 내적인 사람의 내적 갱신이 이뤄진다”고 가르친다.†普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묶어놓았다. 우선적으로는 세례의 예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신자의 선행에 의해서 보충되어야만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최종적 칭의를 얻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며 내적인 덕목들을 제공한다. 로마 가톨릭의 성도들은 결코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을 가진 자가 선행을 통해서 의로운 열매를 입증해야만 한다. 믿음과 구원으로부터 실족하거나 스스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湯慴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ess. 6, chap. 7.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례를 통해서 은혜의 주입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현재 상태에서 결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총의 주입이 있어야만 한다. 은총의 주입을 시행하는 미사와 성례는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집행된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로서 1508년경부터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서 죄인이라는 주제를 놓고 씨름했었다. 마침내 1515년과 1516년경에 이르러서 로마서 1장 17절에 담겨진 복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재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통찰력과 이해는 루터의 생애에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제시되었으며, 성도가 율법을 준수하거나 공로를 쌓아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普 우리가 선행을 함으로써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자에게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로 있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제를 바침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했다.†普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열매가 있기 이전에, 나무가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그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 믿음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湯慴 Luther’s Works, 25:242.

湯慴 Luther’s Works, 25:278. “For just as God and his counsel are unknown to us, so also is our own righteousness which completely depends upon him and his counsel.”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성령이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고 가르쳤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창 15:6, 롬 4:3, 갈 3:6).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간주해 주신다 (합 2:4, 롬 1:17, 갈 3:11). 하나님의 의로움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롬 3:22). 이 믿음의 대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성경에말하는 참된 믿음은 항상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그의 것으로 전가시켜주신 것이 칭의의 근거이다 (갈 3:6-18, 22-24, 행 10:43, 13:39 히 10:38).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 성도들에게는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총이 주어진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였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제공하는 은혜의 수단들인 말씀과 성례들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데 중요한 수단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세례의 물이 부어질 때에 자동적으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로마 가톨릭의 왜곡된 가르침에 반대했다. 성직자가 붓는 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믿음으로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4)이중 칭의론 비판

로마 가톨릭에서는 주입된 은총을 가르치기 때문에, 확고하고도 최종적인 칭의 단계적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처음에는 세례의 은총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개인 성도의 선행이 상호 협동작용을 통해서 칭의가 유지되고 증가한다는 것이다. 최종적 칭의는 인생의 마지막 심판에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최종 심판에서 세례를 받은 자가 실제적으로 의로운지의 여부를 결정하신다고 한다. 오직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의롭다는 선고를 하실 것이다. 성도가 은혜로 값없이 받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은 최종 심판에서 의롭다는 선고가 주어질 것이라 하여, “이중적 칭의교리” (twofold justification)를 가르치고 있다.†普

湯慴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ess. 6, chaps, 10-13.

이중적 칭의교리는 모든 성도들을 로마 교회의 “고해성사”라는 예식에다가 일평생을 묶어놓게 만들었다. 이 고백의 예식을 통해서, 성도는 먼저 성직자에게 가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마음으로 애통해야만 하고, 입술로도 자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성도가 죄의 책임에서 면제를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사함을 얻는다. 그러나 일시적인 형벌을 벗어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의무가 남아있는데, 죄를 보상하는 만족을 드리기 위해서 “선행”(the good works)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자들은 개인 성도가 믿음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기에 칭의란 단번에, 즉각적이며, 완벽한 외부적 선포라고 풀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영적인 갱신이 일어남과 동시에 죄의 용서가 주어지며, 칭의도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성경적인 칭의는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 받는다.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칭의는 개인 성도의 선한 행위와 공로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인다. 성도는 자신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구원사역에 의존하여서 구원에 이른다. 진실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에게는 영적인 갱신이 일어남과 동시에 죄의 용서가 주어지며, 칭의도 주어진다. 성도의 죄는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성도의 것으로 전가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묶어놓고서, 이중칭의론을 만들었다. 믿음을 고백하며 받는 세례예식에서 처음 시작할 때에 “은총의 주입”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계들에서 칭의가 확대되어나가는데 은총과 선행의 협동이 일어나게 되고,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성도의 선행이 칭의의 원인이거나 근거가 될 수 없다. 선행과 거룩한 행위들은 살아있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들이다.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은 개인 성도가 선행을 통해서, 후속적으로 성취한 공로에 의존하여 최종 칭의에 도달하게 된다는 개념을 철저히 거부했다.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최종 칭의론을 따라가면, 성도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요,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질 뿐이다. 개인 성도가 순종을 함으로써 얻는 것이 둘째 칭의라고 하는 것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들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혜택들이 모두 아홉 가지라고 밝혀냈다; 소명, 중생, 믿음, 회개, 양자됨,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등이다.†普 이런 여러가지 은택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룬 개인 성도의 삶에서 이뤄지고 있다. 칭의는 성령의 내적인 변화사역으로 중생한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으로 연속되어진다.

湯慴 John M. Frame,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P&R, 2013), 923.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39).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혼합시켜놓았고, 그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이중 칭의론이라는 교리를 또 덧붙이게 된 것이다. 성경에 따르지 않은채, 칭의 교리가 잘못세워놓으니, 결국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또 다른 교리들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은 칭의가 분명히 성화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갱신시키는 행위들을 요구하심에 따르는 행위를 말한다. 칭의와 성화는 각기 다른 구원의 축복들이요, 구원의 혜택들에 속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요, 성화는 의롭다하신 성도들이 내적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되지 않는 자를 결코 의롭다고 선포하지 않으신다.

3. 연옥설은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죽음 이후에 연옥(purgatory)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다. 죽은 후 영혼이 정토에서 순화의 과정을 밟아간다는 상상은 이집트, 헬라, 로마의 신화들 속에 있었고, 인도와 페르시아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레고리 교황 (590-604)이 신화적인 연옥설을 공식화했다.

로마 가톨릭에서 두 가지 죄를 가르치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 (mortal sin)과 용서받을 수 있는 죄 (veneial sin)이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란 하나님과 교회의 법을 어긴 작은 죄들이다. 두 가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형벌, 영원한 심판과 일시적인 심판을 내리신다고 말한다.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영원한 심판이 내려지는데, 세례와 고해성사, 고백에 따른 약속을 믿고 애통하는 행위에 의해서 면제를 받는다. 일시적 심판은 성례들에 의해서 취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해성사, 자선행위, 성직자들을 공경한 행위, 면죄부 등에 의해서 경감될 수 있다. 사망에 이르는 죄라하더라도, 연옥에서는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일시적인 형벌로 대체될 수 있다. 성직자들에게 고백을 하는 자들은 모든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충분한 선행이 없는 경우에는 완전히 정화될 때까지 연옥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1) 죄의 보상과 정화

가톨릭에서는 세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한 보상을 치루는 장소로 연옥을 고안해 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지만, 충분한 보상과 징계를 치룬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죄를 두 가지로 나누는 놓는 것과 보상의 행위를 통해서 경감을 받는다는 해결책이나 모두 다 전혀 성경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다.

연옥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곳이라고 로마 가톨릭은 가르친다. 우리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화염에 휩싸여서 엄청난 고통의 형벌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지내야만 한다. 다만, 친척이나 친구가 교회에 공로를 쌓으면, 기간이 줄어들거나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특별한 관리하에 연옥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교황은 연옥의 고통을 바꾸거나, 경감하거나, 종결지을 수 있다. 일부 제한적이지만, 교황의 위임을 맏은 성직자들도 이러한 권세를 대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모든 자들이 교회와 평화를 유지한 채 죽어야만 하며, 온전하게 살지 못한 자들은 정화의 고통을 중간 상태로 알려진 연옥에서 당해야만 한다고가르친다. 오로지 완전하게 기독교 신자로서 살아간 사람들만이 직접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지 못한 모든 성인들과 세례를 받은 후에도 사망선고를 받아야하는 죄를 범한 자들은 즉각 지옥으로 간다. 교회와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완전치 못하게 일부분만 성결한 삶을 유지한 자는 연옥으로 간다. 오래 머물자도 있고, 짧은 시간만 머무는 자도 있는데,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다 벗어버린 후에야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세례는 원죄와 개인적인 자범죄 모두를 제거하는 예식인데,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례 직후에 곧바로 사망했다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가르친다. 그 밖에 모든 기독교인들은 세례 이후에 범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심지어 고위성직자라 하더라도,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단 순교자는 이런 고난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교회를 영예롭게 한 행위가 있는 자에도 역시 연옥에서의 고통이 면제된다.

어떻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땅 위에서나 느낄 수 있는 불길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궤변에 해당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땅에 사는 육체와는 다른 종류의 몸을 가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형태/ 어떤 조직체로 된 육체인가?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어떤 종류의 육체로 머물게 되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제시한 바 없다. 연옥의 불은 지옥의 불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명한 바 있다. 지옥에서 저주받은 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똑같이 연옥에서도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을 능가하는 고통인데, 다만 연옥에서 머무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고 하였다.

따라서 연옥설은 완전히 가상적이며, 허구적 발상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연옥과 관련된 그 어떤 부분도 전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普

湯慴 Augutus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1041.

로마 가톨릭은 죽음과 형벌이라는 사람들의 극한적인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옥설은 종교적 우려와 두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해성사와 관련한여 성직자들에 대한 두려움, 미사에 불참한 것에 대한 두려움, 성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등이 컸다.

2) 선행이라는 명목의 돈과 기부금

연옥 교리는 성직자들에게는 황금 광맥과 같다. 그야말로 돈이 들어오는 창구이다. 로마 가톨릭이 막대한 자금과 재산을 운용하며 유지하는데 있어서, 신도들의 막대한 기부금이 교회에 바쳐지도록 연옥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기간은 기부금이나, 성직자들의 기도나, 미사의 기원 등으로 단축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것들은 신자가 죽기 직전에 준비해서 교회에 바칠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더 많은 만족을 드리면 드릴수록, 연옥에서 속죄를 위해서 머물러야하는 기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 성도가 죽음에 이르면, 성직자가 곁에서 종부성사를 집례하게 된다. 성직자는 엄숙하게 천국으로 보내는 선언을 한다. 그러나 마침 그 자리에 신부가 없을 경우에는, 연옥으로 들어간 영혼을 위해서 가족 친지들이나 친구가 미사를 드려야 하는데, 여기에는 먼저 기부금이 바쳐져야만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진행된다.

중세시대에는 대부분이 무학력 자들이었고, 문쟁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원에 관련한 내용들을 이처럼 퍼트려서 돈을 바치도록 만들었다. 외부적으로 드러내놓고 구원을 돈으로 사가라고 직접적으로 홍보하지는 않았지만, 실재로는 그와 다를바 없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 머물고 있는 기간을 단축하기 원한다면 합당한 기부금이나 봉사나 선행이 교회에 바쳐져야만 한다. 이로 인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재물을 긁어모으는 기관이 되었다. 로마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들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모여진 돈으로 거대한 성당들을 건축하고, 수도원을 세웠으며, 영지들을 구입했다. 그것을 바치는 성도들은 가난하기 그지없었으나, 로마 교회당은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

특히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서 벌어진 일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라티노라고 불리우는 원주민들은 허름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의식주가 형편없다. 브라질, 멕시코, 칠레 등 남미 여러 곳에 세워진 로마 가톨릭의 성당들은 겉모습으로만 웅장한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성동들은 국가 전체의 땅에서 3분의 1, 혹은 4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그 땅들을 원주민들에게 재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생전에 선행과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다시 로마 교회에 바치는 경우가 많다.

만일 교황이 연옥을 지배하는 권세가 있다면, 혹은 고위 성직자들에게도 그러한 권능이 주어져 있다면, 어찌하여 그처럼 참혹한 연옥의 고통에 놓여있는 가난한 자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와 축원을 드리지 않는가? 만일 그 성직자들이 착한 사람들이라면, 불쌍한 자들을 고통과 슬픔에서 꺼내주기 위해서 무료로 기꺼이 권한을 사용해야 하지 않는가! 연옥의 고통이 그토록 심각하다면, 영혼의 석방을 위해서 인간성을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교리 체제가 오직 돈의 대가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병원의 응급실에서, 의사들과 간호사 등은 환자를 살려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교황이나 성직자들은 그냥 연옥에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방치하고 있는가?

3) 연옥이란 곳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이미 주셨고, 사후에 받는 영혼의 저주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죽은 후에 연옥과 같은 어떤 곳에 갔다가, 다시 또 다른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실 때에, 한편 강도가 회개를 하였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다”(눅 23:43)고 말씀하셨다.

사망의 어두움에 던져진 자들은 거처를 옮기거나 바꿀 수 없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사후에 각각 들어간 곳이 다르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6).

결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필자기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가짜 교리들을 수없이 많이 가르치고 있다. 교황 제도와 교황무오설, 고해성사, 마리아 숭배, 면죄부, 성자들에 관한 교황청의 교서, 성직자 중심주의와 독신주의 등등 모두 다 우상숭배이며, 거짓 교리들이다. 과연 성경 말씀 어디에 이런 것들에 대한 가르침이 있던가!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성례들에 관한 것들을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필자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