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성 선교사,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개척

지난 7월 말 남가주를 방문한 김삼성 선교사를 만나 카자흐스탄과 실크로드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교회 개척과 복음 전파의 역사를 들어봤다.

김 선교사는 1990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들어가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20년간 뇌전증을 앓던 한 여성이 기도 후 치유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작은 아파트에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일 정도였다.

김삼성 선교사.
(Photo : 기독일보) 김삼성 선교사.

그러나 김 선교사가 사역을 이어가며 깨달은 것은 '말씀이 없이는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치유와 축사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모였지만, 말씀이 자리 잡지 않으면 같은 영적인 문제가 반복됐다. 그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3~4시간씩 일주일에 세 차례 모여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성경을 깊이 공부했다. 그렇게 시작된 성경학교를 통해 수년간 약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이후 김 선교사의 시선은 한 지역의 교회를 넘어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향했다. 2001년부터 7년간 '실크로드 청년 페스티벌'을 열어 중앙아시아 각국과 중국 신장, 몽골 등지에서 청년과 예비 교회개척자들을 모았다. 첫해 약 800명이었던 참가자는 이후 1,200명, 1,600명, 2,000명으로 늘었고, 많게는 5천 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는 매년 두 차례씩 2주간 집중적으로 참가자들을 훈련했고, 현지 교회들의 지원으로 숙식과 교통비까지 마련했다. 이를 통해 약 500명의 교회 개척자를 세워 파송했다.

그러나 현지 보안당국이 이 모임을 미국과 연계된 활동으로 의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 교회에 당국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조사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2006~2007년 무렵 페스티벌을 중단했고, 이후 수년간 교회와 사역자들을 향한 감시가 이어졌다.

김 선교사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처음부터 제자화에 집중했던 것이 중요했다고 돌아봤다. 교인 수를 늘리는 것보다 알파코스와 인카운터, 제자훈련 등을 통해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데 힘썼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삼성 선교사.
(Photo : 기독일보) 김삼성 선교사.

아파트에서 시작된 교회

김 선교사가 처음 카자흐스탄에 들어간 것은 1990년 12월이었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선교지로 나갈 길을 찾던 그는 당시 김광신 목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바라보게 됐다.

"당시 그 지역에는 한인 선교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문을 여시는 지역에 누가 먼저 부르심에 응답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특별한 능력이나 준비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았다.

"제가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솜씨가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선교 훈련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첫 번째로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 사람은 모이십시오"라고 했더니 고려인 몇 명이 찾아왔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어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현지인들이 통역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 한 젊은 여성이 기도를 받게 됐다. 20년 동안 뇌전증으로 고통받으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약을 복용해야 했던 여성이었다.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했는데, 기도 중 쓰러졌다가 일어난 뒤 몸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도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이 일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삼성 선교사.
(Photo : 기독일보) 김삼성 선교사.

치유에서 말씀으로

당시 카자흐스탄은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직후였다. 사회를 통제하던 체계가 흔들리면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신비주의 등 여러 사회적·영적 문제가 나타났다. 교회 안에서도 정신적·영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김 선교사는 한동안 치유와 축사 사역을 병행했다. 금요철야 때 별도의 사역팀을 만들어 기도했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에 관한 말씀도 가르쳤다.

그러나 1년 정도 지나면서 같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생겼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스스로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가 단순히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스스로 믿음을 세워갈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성경 교육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20여 명이 모여 3~4시간씩 공부했다. 일주일에 세 차례, 3개월 동안 한 주제를 정해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성경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이 인간의 영·혼·육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를 중심으로 교회 전체를 세우는 교육 과정으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성경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수년 동안 약 2천 명에 이르렀다.

청년을 교회 개척자로...실크로드 청년 페스티벌

말씀으로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자연스럽게 교회 개척으로 이어졌다.

2000년 무렵 김 선교사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청년들을 교회 개척자로 세우기 위한 '실크로드 청년 페스티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마티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행사를 열었고, 이후 교회 개척을 원하는 청년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라칼팍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뿐 아니라 중국 신장과 몽골에서도 참가자들이 찾아왔다.

2007년 무렵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만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를 위해 국경을 넘어왔다. 국경에서 제지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 선교사는 중앙아시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길목마다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들이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구조를 꿈꿨다. 그 결과 약 500명의 교회 개척자를 세워 파송했다.

카자흐스탄 당국의 감시와 박해

그러나 페스티벌이 커질수록 현지 당국의 감시도 심해졌다.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받으면서 교회와 사역자들이 조사를 받고, 사무실과 교인들까지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페스티벌은 2006~2007년 무렵 중단됐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그때까지 진행해 온 제자화 사역이 교회를 지탱하는 기반이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제자화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계속 양육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가 처음부터 붙들었던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이었다.

"처음부터 제 마음속에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이후 예루살렘의 유니버시티 오브 홀리랜드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6~7년간 가르쳤고, 다시 터키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현재까지도 중앙아시아에서 사역자들을 세우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출발점에 대해 김 선교사는 거창한 준비보다 '첫 번째 순종'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땅의 문이 열릴 때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사역 현장에서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