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서정희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장을 읽다가 이 구절 앞에서 오래 멈추었다.
처음에는 ‘화목’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음식이 보였다.
마른 떡 한 조각.
그리고 제육이 가득한 집.
왜 하필 음식일까.
나는 화려한 음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강된장, 된장찌개, 김치, 잘 지은 흰밥.
이 정도면 꽤 행복하다.
고기도 좋아하고, 보리굴비나 자연송이가 올라오는 날이면 더 좋다.
한 끼에 50만 원 가까이 하는 음식도 먹어보았다.
그렇다고 반드시 더 맛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좋은 식재료를 보면 탐이 났던 적은 있다.
오히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음식보다 식탁을 차리는 일이었다.
접시를 고르고, 그릇의 위치를 정하고, 음식의 색을 보고, 빈 공간을 남기는 일.
나도 세팅하면 한 세팅 한다.
그런데 식탁을 다 차려놓고 나면 음식보다 궁금한 것이 생긴다.
이 자리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남을까.
런던에 갔을 때 내셔널 갤러리에서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직접 본 적이 있다.
누가복음 24장의 한 장면이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와 길을 함께 걸으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다 식탁에서 예수가 떡을 떼어 주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린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를 알아본다.
그런데 나는 그림보다 그다음에 나오는 두 제자의 말이 오래 남았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았느냐.”
이상한 말이다.
그들은 예수를 알아본 뒤에야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알아보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뜨거웠다.
길을 걸으며 말씀을 들을 때,
아직 눈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음에서는 이미 무언가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본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묵상이라고 생각한다.
묵상은 모든 것을 곧바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뜨거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새겨 보는 일이다.
성경을 읽다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한 문장.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단어 하나가 그날따라 오래 남는 순간.
설명은 잘 안 되는데 자꾸 다시 읽게 되는 구절.
그때는 아직 답을 얻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안다.
‘아, 이것은 그냥 지나가면 안 되는 것이구나.’
어쩌면 ‘알아봄’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눈으로 먼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먼저 도착하는 것.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문장을 적고,
성경을 읽다가 오래 머무는 단어를 적고,
그림 앞에서 멈춰 섰던 순간을 적는다.
사람에게 들은 말도 적고,
살면서 생긴 질문도 적는다.
당장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아서 적어둔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몇 년 전의 문장이 오늘의 생각과 만나는 순간이 온다.
예전에 읽은 책 한 권이 오늘의 성경 구절을 설명해주고,
오래전에 본 그림 한 장면이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을 밝혀준다.
그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기록해둔 문장이 시간을 건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다.
그때 나는 알아본다.
아, 그때의 그 문장이 이것을 말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내게 메모는 단순히 기억을 저장하는 일이 아니다.
미래의 나를 위해 생각의 식재료를 준비해두는 일이다.
내 메모장에는 책의 문장도 있고,
성경의 단어도 있고,
그림도 있고,
사람에게 들은 말도 있고,
살면서 건져 올린 작은 질문도 있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놓여 있던 것들이 어느 날 한 편의 글 위에서 만난다.
그때 나는 내가 글을 만들어낸다기보다
오랫동안 모아둔 것들을 꺼내 한 상 차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글의 풍요로움도 그렇다.
많이 아는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 보고, 오래 읽고,
마음에 머문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는 데서 온다.
이 대목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생각한다.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자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아주 현실적인 문장 하나를 만난다.
“One cannot think well, love well, sleep well, if one has not dined well.”
잘 먹지 못한다면, 잘 생각할 수도, 잘 사랑할 수도, 잘 잘 수도 없다.
나는 이 문장이 좋았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생각할 공간도 필요하고,
읽을 시간도 필요하고,
책을 살 돈도 필요하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자며 몸을 돌볼 수 있는 생활도 필요하다.
결국 생각과 생활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좋은 식탁은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위한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식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말을 나누고,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장소다.
그러다 잠언의 식탁으로 돌아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풍요의 마지막 조건은 무엇일까.
잠언은 풍요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좋은 음식도 좋고,
좋은 집도 좋고,
좋은 책도 좋고,
좋은 여행도 좋다.
나 역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다만 그것들이 많아지는 것과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닐 수 있다.
잠언은 제육이 가득한 식탁과 마른 떡 한 조각을 비교하면서,
결국 음식의 양보다 그 식탁에 있는 화목을 이야기한다.
제육이 가득한가보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잃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나는 이것을 가난을 미화하는 이야기로 읽고 싶지 않다.
오히려 풍요를 어디에서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읽는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보았던 〈감자 먹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희미한 램프 하나가 어두운 식탁을 비추고 있다.
농부들의 거친 손과 남루한 옷,
그리고 그들이 직접 농사지었을 감자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화려한 음식은 없다.
세련된 그릇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식탁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감자를 먹고 있었을까.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와
자신들이 키운 감자를 나누어 먹는 저녁.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식탁에는
자신들의 노동과 하루의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흐가 그 장면을 그리며 붙잡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감자의 모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끼의 음식 뒤에 있는 사람들의 삶,
그리고 함께 먹는다는 것의 무게.
카라바조의 식탁에서는
떡을 떼는 순간 눈이 열리고 예수를 알아보았다.
고흐의 식탁에서는
한 끼의 음식 뒤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잠언의 식탁에서는
내가 나의 식탁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식탁을 차리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풍요로운 식탁에는 음식만 놓이지 않는다.
책 한 권이 놓이고,
성경 한 구절이 놓이고,
오래된 메모 한 장이 놓인다.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가 놓인다.
나는 칼럼을 쓸 때도 이런 식탁을 차리고 싶다.
읽는 사람이
“좋은 말이네” 하고 끝내기보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한 번 찾아보고,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앞에 잠시 머물러 보고,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펼쳐보고,
엠마오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고,
자기도 마음에 남은 문장 하나를 적어보았으면 좋겠다.
글은 생각을 끝내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각을 시작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묵상도 그렇다.
성경을 읽고 무엇을 다 알아냈다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움 하나를 마음에 새겨두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
시간이 지나 그 기록이
다시 한 문장이 되어 돌아오는 것.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마음이 먼저 알아보고
눈이 나중에 알아보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묵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고 계신 것을
내가 뒤늦게 알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기록의 끝에는
마음이 뜨거워진 한 문장이 남는다.
그 한 문장이 오늘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때로는 오래전의 나와 오늘의 나를 만나게 한다.
그러니 다시 식탁을 생각한다.
내 식탁에는 강된장과 김치와 흰밥이 올라올 수도 있고,
보리굴비와 자연송이가 올라올 수도 있다.
좋은 책 한 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