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서정희
교만이라는 단어 앞에서 자꾸 멈춰 선다.
나는 교만한 사람을 생각하면 목소리가 크고, 남을 무시하고, 가진 것을 과시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거짓말로 사람을 꾀고, 재빠르게 좋은 것을 골라 갖고, 허세를 부리고, 남을 위협하고, 덫을 놓아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한 사람들. 그런데 세상은 때때로 그런 사람들을 신사라 부르고, 유능한 사람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며 가네다 집안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람은 때로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유능해 보이는가에 더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런데 잠언을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자꾸 내가 보였다.
“나는 다 경험해 봐서 알아.”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듣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다.
나의 경험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했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의 환경과 인기, 사람들이 보내 주었던 관심을 감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서 슬며시 나를 높이고 있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교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교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거대한 얼굴이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평범한 확신의 얼굴로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
잠언 16장 18절.
이 말씀은 남을 향한 경고처럼 읽히다가 어느 순간 나를 향한 거울이 된다.
교만은 단순히 나를 높이는 마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믿는 순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자리가 사라지고, 내가 가진 것을 내 힘으로 착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내가 앉는다.
하와처럼.
루시퍼처럼.
그래서 말씀은 자꾸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의 자리에 앉아 있느냐.”
내가 잘나갈 때의 얼굴
나는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고, 내가 가진 것들이 나의 이름과 함께 빛나던 시간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뻐했다.
기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할 수도 있다.
다만 그때의 나는 감사와 자랑 사이에 놓인 아주 얇은 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과
받은 것을 나의 자격으로 착각하는 것은
겉으로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만은 무섭다.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교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언 16장은 교만을 거대한 죄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말과 욕망, 분노와 이간, 자기 절제의 문제까지 삶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말 한마디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감정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관계를 무너뜨리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마음이 어느새 나를 끌고 간다.
모든 욕망이나 분노가 곧 교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들어 있다면, 나는 멈추어 보아야 한다.
특히 32절에서 오래 머물렀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을 정복하는 것보다 자기 마음 하나를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밖의 것을 참 많이 정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내 안의 마음은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있었을까.
나의 사이렌은 무엇일까
문득 오디세우스의 사이렌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이렌의 노래는 너무 아름다워서 듣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오디세우스는 그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유혹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원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묶어 달라고 했다.
자신이 아무리 풀어 달라고 소리쳐도 절대로 풀어 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 생각했다.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은 자기 의지만 믿지 않는다.
“나는 괜찮아.”
“나는 이 정도는 이길 수 있어.”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할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묶은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서 약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이렌은 무엇일까.
칭찬일 수도 있다.
인기일 수도 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일 수도 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시선에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나를 묶어 둘 무언가가 필요하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멈추는 것.
화를 내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것.
내가 옳다고 확신할 때 말씀을 다시 읽는 것.
욕망이 커질 때 한 걸음 물러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보다 말씀을 더 믿는 것.
나를 묶는다는 것은 나를 억압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무너질 수 있는 곳을 알기에
그곳에서 나를 지켜 낼 작은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옳은 길
잠언 16장 25절은 조금 더 깊은 곳을 찌른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나는 이 구절이 무섭다.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가는 길보다,
옳다고 확신하며 가는 길이 나를 돌아보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옳은 것.
내 경험으로 맞는 것.
내 기준으로 당연한 것.
그것들이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점검되어야 한다.
겸손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오래 읽다 보면 어느 날 말씀이 나를 붙잡는다.
“아, 내가 그랬구나.”
그 순간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거울이 된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씀은 내가 잘나갈 때의 얼굴을 보여 주고, 내가 화낼 때의 마음을 보여 주고, 내가 옳다고 확신할 때의 태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묻는다.
“네 마음은 지금 누구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
성을 빼앗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 교만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작은 자랑이 올라올 때 알아차리고,
내가 약한 곳을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나를 묶어 둘 경계를 만들고,
말씀 앞에서 다시 마음의 자리를 바로잡는 사람.
그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겸손이다.
교만은 나를 높이는 것이고,
겸손은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만도 아니다.
겸손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동시에, 내가 누구의 손 안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나, 교만하지 않은데요?”
라고 말하던 나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조금 늦게 알아차린다.
교만은 멀리 있지 않았다.
거대한 자랑 속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순간,
내 경험을 앞세웠던 순간,
누군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판단했던 순간,
받은 것을 내 능력이라고 착각했던 순간.
바로 그곳에도 교만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다시 묻는 일인지도 모른다.
“주님,
지금 제 마음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조금 낮아지는 것.
아마 겸손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