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Photo : )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

 2024년 2월 말, 미국 앨라배마 대법원은 1872년에 제정된 주(州)법에 따라 배아(胚芽)를 사람의 생명으로 여기고, 냉동배아(Frozen Embryo)를 파괴한 사람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 한 명이 냉동 배아를 저장하는 모빌 인포미티 메디칼 센터 (Mobile Infirmity Medical Center)에서 냉동배아 여러 개를 꺼내 가다가 하나를 떨어뜨려, 시험관이 파손되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배아들도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는 순간에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는 순간부터 세포 분열이 시작되고 그 분열이 계속되어 결국 완전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의학계에서도 의견이 일치 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종교관과 윤리관까지 충돌하며 쉽게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배아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것은 미래의 생명체들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아가 몇 개의 세포라고 생각하면 못쓰게 된들 하등 문제가 없지만, 배아들이 생명이고 미래의 인간으로 본다면 미래의 아이들이 살해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배아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후 세포분열을 시작한 단계로서 임신 8주 이전의 상태를 말하고, 8주 이후에는 태아(胎兒)라고 부릅니다. 시험관 아기는 1978년 영국에서 최초로 태어났고, 한국에서는 그때로부터 7년 후인 1985년에 성공적으로 시험관 아기가 출생하였습니다. 시험관 아기는 자궁의 환경이 만들어진 시험관에서 임신 준비가 된 난자와 정자를 합성시켜 배아를 만듭니다.

 실패를 예상해서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들어 그 중 건강한 몇 개를 자궁에 정착시키는데, 이에 따라 체외 수정의 경우 쌍둥이가 많이 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쓰이지 않는 태아들은 얼려서 보관을 하는데, 임신을 원하는 부부에게 태아를 기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분명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은 5절 말씀대로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해 두셨다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여인의 몸 안에서 이루어졌건 밖에서 이루어졌건 간에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결합되는 순간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이론들은 성경에 맞지 않는 이론이고, 성경에 맞지 않는 이론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또 세상에서 데려 가십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 인간의 생명은 시작되었고 그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낙태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살인입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세상에 보내셨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샬롬.

L.A.에서 김 인 수 글.

John Lee 이요한 목사님, [3/20/2024 6:30 PM]
인생을 그리는 화가
여호수아 18장 1절-10절

화가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단계에는 화가의 손 끝에서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고, 화가가 완성하려고 하는 그림의 모습이 드러난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면 화가가 그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의도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계셨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민34: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이미 정해 놓으셨다. 12 지파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실려고 하는 그림을 완성하려고 하셨다. 하나님이 구상한대로 그림대로 완성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소유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어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축복하는 영향력 있는 나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상해 놓으신 그림을 실제로 다 펼쳐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린 그림대로 살지 않고 자기가 그린 그림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축복하는 말이 있다. "너 앞으로 큰 인물 되겠다." 특정한 아이들에게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모든 아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믿음으로 인생을 그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큰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 배경, 출신 성분, 가진 능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된다.

우리가 큰 인물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말을 사용할까? 그 사람이 그리고 있는 자기 인생의 그림 크기다. 자기 인생의 그림을 가정 안에서만 그리면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 자기 인생의 그림을 나라와 함께 그리면 나라의 인물이 된다. 세계와 함께 그리면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이것도 대단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 있다. 하나님과 함께 자기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의 중요한 부분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지파가 함께 모여서 땅분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정복한 땅을 나누어 가지는 땅나누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려 놓으신 큰 그림, 즉 비전을 선포(Casting)하는 자리였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선포되자 각 지파별로 반응이 다르게 나왔다.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브론 땅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갈렙의 나이가 85세이고, 그곳에 거인들인 아낙자손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능히 정복할 수 있다라고 믿음의 선포를 한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이 선포될 때 갈렙의 머리 속에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갈렙이 큰 인물이다. 갈렙을 반응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그러니까 갈렙의 나이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갈렙을 붙들어서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이 있다. 100만불을 선교지로 흘려보내고, 200개 나라에 선교팀을 보내는 것이다.(1+2 Project). 기도하는 120명의 기도의 용사들이 세워져서 흑암의 권세를 꺾고 영적인 흐름을 주도하는 영적인 제사장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프로젝트가 이루어져서 달라스의 부흥의 불을 지피는 것이다. 이 비전이 우리 인생의 그림이 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비전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선포되었을 때 갈렙 같은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 주에 보았던 요셉지파가 있었다. 자기의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지파를 돕기보다, 자기 것을 챙기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오늘 이야기 속에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2절과 3절에 보면, "2.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7개 지파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땅을 정복하러 가지 않고 머뭇 거리고 있었다. 2절에 보면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 나와서 오해를 할 수 있는데, 분배를 못 받은 것이 아니라 분배를 받았는데 점령하러 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3절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라고 한 것이다.

7개 지파는 왜 땅을 분배 받고도 점령하러 가지 않았을까? 1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베이스 캠프는 길갈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차 땅분배가 이루어졌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자리를 옮겨서 실로에 성막을 세우고 하나님의 법궤를 그곳에 모셨다. 이곳은 에브라임지파에게 주어진 땅이었다. 그런데 7개 지파는 그때까지 자기들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러 가지 않고 실로에 머물러 있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3절)”는 여호수아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서 흩어지지 않고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7개 지파가 땅을 차지하러 가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익숙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대로 좋은데 왜 흩어지라고 하는가? 다 함께 모여서 편안하게 잘 살면 되지 왜 굳이 떨어져서 어렵게 개척하고, 싸우고 해야하냐는 것이다. 7개 지파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살아야할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도 바로 이 익숙함과 편안함이다. 우리끼리 좋은데 왜 힘들게 지역봉사를 하고, 선교를 하나? 지금 가지가 편안하고 익숙한데 왜 가지를 나누어서 불편해져야 하는가?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좋은 분위기가 안깨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교회를 지배하면 그때부터는 그 교회는 사명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인물을 시간이 지나면 썩게 된다. 우물은 계속해서 퍼내야 맑은 물이 나온다.

우리는 편안함과 익숙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껴안는 열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삶이 무너진 사람들, 인생이 깨어진 사람들, 영적으로 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회복되어야할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이 와서 말씀과 복음으로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7개 지파가 머물러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싸웠다. 유능한 여호수아가 있었고, 많은 백성들이 함께 있어서 아무리 강력한 적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각 지파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각 지파별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전쟁하러 가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익숙함과 두려움에 발목을 잡혀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반응하지 못하고 실로 땅에 눌러 앉아 있었다.

John Lee 이요한 목사님, [3/20/2024 6:30 PM]
우리의 모습 속에는 7지파가 가진 익숙함과 두려움의 모습은 없는가? 문제 앞에서 실망하고 낙심해서 주저 앉아 있지 않는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현실에 발목을 잡고 있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지는 않는가? 믿음의 결단을 하려고 해도 익숙함과 두려움 때문에 결단을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7개 지파를 향해서 여호수아가 내놓은 대책이 있다. 그 내용이 4절-10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대표를 뽑게 했다. 그리고앉아 있지 말고 가서 너희들이 정복할 땅을 다 돌아보고 너희 손으로 직접 그 지도를 그려오라고 했다. 왜 여호수아는 각 지파의 대표들에게 자기가 정복할 땅으로 가서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지도를 그려오라고 말을 했겠는가?

첫 번째는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다니며."(4절) 머리로만 생각만 하지 말고 가서 그 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보라는 것이다.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생각만 강화되고 두려워지기만 한다. 자기가 한 없이 작아 지기만 한다. 못할 것 같은 생각이 자기를 지배하고 움추려 들게 된다. 그런데 믿음으로 직접 부딪혀 보면 그 안에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힘들게 보이는 길이라도 그 길을 출발한 사람은 그 여행을 마무리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만 하고 있는 출발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그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없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저 자신에게 격려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한 걸음을 옮기면 한 걸음이 줄어 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의 시간이 100걸음이라면 한 걸음을 옮기면 적어도 한 걸음은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100걸음 만 걸으면 그 고통을 이겨내게 된다.

나는 군대에서 그것을 배웠다. 군대를 갔는데 우리 부대가 산악부대였다. 좋은길 다 놔두고 산길로만 다녔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를 받자 말자 훈련을 따라 나섰다. 이등병이 뭘 알겠는가? 20-30kg 되는 군장을 메고, M60 기관총을 군장 위에 얹고 행군을 하는데 밤에 산길로 가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100km를 행군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공포심으로 나를 덮쳤다. 한 밤중에 좁고 험한 산길을 걷는 내내 고민했다. 그냥 쓰러질까? 계속 걸어갈까? 한발을 옮길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고 걸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1차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제 마음 속에 “그래, 걷다보니 쉴때도 오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걸음이 줄어들었구나!라고 걸었다. 그 생각으로 걸어니까 어느 새 훈련이 다 끝났고, 100km를 완주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한 걸음을 옮겨라. 그럼 한 걸음이 줄어들고, 하나님과 함께 옮긴 그 한 걸음이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목적지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정복할 땅을 직접 그리라고 말을 했다.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라는 말이다. 그냥 되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말이다. 막연하게 생각한 계획들은 실행에 옮길 수 없지만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정말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운다.

우리 인생의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이 있다. 인생의 그림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갈렙은 자신의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의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니까 85세의 나이에도 헤브론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왜 우리가 우리 인생의 그림을 하나님과 함께 그려야 하나? 내가 그린 그림은 내가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사업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그림을 그려내는 사람들이 사업가들이다. 그런데 사업가들이 혼자 그림을 그리면 그것은 아무리 잘 그려도 몽상이다. 그런데 그 그림을 투자자와 함께 그리면 그 그림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업가가 그리는 그림에는 반드시 투자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의 그림을 하나님과 함께 그리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투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 그림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그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모세의 인생에 그림을 그려주셨다. 여호수아의 인생에 그림을 그려주셨다. 그리고 투자하셔고, 그 일을 이루게 하셨다.

여러분의 인생의 그림에는 뭐가 들어가 있는가? 여러분의 인생의 그림에 영혼 살리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투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그림을 그려 넣으시기 바란다. 1+2Project도 넣고. 120명의 기도 용사의 그림도 넣으라. 그럼 그 그림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셔서 여러분의 인생의 그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 내 인생은 왜 이리 작습니까? 내 인생은 왜 이리 고난이 많습니까? 왜 이리 우울하기만 합니까?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왜 내 인생은 고통스럽기만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신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이 그려주신 그림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 스스로 인생의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오는 문제다. 익숙함과 두려움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믿음으로 싸우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들이다. 복음 전하고, 세례 배풀고, 제자 삼는 일에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28:18-2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고, 승리를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와 사탄의 권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다. 어려움 중에도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는 기도의 능력을 주셨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런 권세와 무기를 가지고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과 싸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두려움과 직면해서 싸우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내 디딘 만큼 문제 해결로 한 발짝 다가가게 된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취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