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자살이다.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한국의 자살률이 최근 몇 년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많은 자살자들 중에는 기독인들도 더러 있다. 자살을 해야만 했던 저들의 처절한 상황과 심적 고통, 아픔을 짐작해 볼 때에 동정감도 갖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목숨을 끊어 자살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 할 수 있는 일일까? 하나님 앞에서 그 엄청난 죄에 범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물론 성경에는 자살하면 누구나 천국에 가지 못한다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 갈 수도 있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말해주고 있는 사건과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자살한 자들이 누구이며 왜 자살하게 되었는가?
성경에 자살을 한 자들 몇이 있다. 구약에서 자살한 자로서는 첫 번째가 사울왕이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는 참으로 겸손한 자였으며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 권력을 손에 쥔 후에는 교만하여 악하게 되었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적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자 자신의 칼로 자살을 했다.(삼상31:4)

두 번째로 자살한 자는 아히도벨이다. 다윗왕 후기, 쿠데타를 일으킨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책사로 활동한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이려는 묘락을 압살롬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불만을 갖고 고향집에 돌아가 목을 메달아 자살했다.(삼하17:23).

세 번째 자살자는 시므리이다. 북왕조 이스라엘 엘라왕의 장관으로 왕의 병거를 절반을 통솔하였던 시므리는 엘라왕을 모반하여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지만 그 기간은 7일에 불과했다. 시므리가 모반을 꾀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오므리를 이스라엘 왕을 삼았고 오므리의 군대가 시므리의 성을 함락하자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붙여 태우며 자기를 불살라 자살했다(왕상16:18).

가룟유다는 왜 자살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자살하게 되었는가?
신약에서 자살한 자는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의 복음 사역의 모든 재정을 관할하였던 제자로 동료 제자들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고 있었다. 물론 유다도 처음부터 물욕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더욱 왕성해 지고 커지자 유다의 재량권도 높아지게 되었으며 물욕이 꿈틀거리게 되었다. 유다는 그 재정 중에서 얼마를 슬그머니 감추어 자기 소유로 삼기 시작했으며 결국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요12:6). 베다니에서 예수에게 향유를 붓고 있던 베다니 마리아를 향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고 질책하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자선자로 미장하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나를 팔자’라 말하시면서 한 조각을 찍어 가룟유다에게 주었고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예수 파는 일)”고 말씀하였다. 그 떡 조각을 받은 유다는 예수를 팔아 넘기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유다가 명절에 자기들이 쓸 물건을 사려 간 줄로 알거나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인가 사서 나눠 주려고 나간 줄로 알았다(요13;26-29). 유다가 얼마나 완벽한 박애주의자로 위장했기에 예수께서 유다가 자기를 팔자임을 지적하여 주셨음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유다는 유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를 팔아 넘겨줄 것을 약조하며 은 30을 받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유다는 무죄한 예수를 팔아넘긴 죄를 뉘우치고 죄책감에 못 견디어 나무에 목 메달아 죽었다(마27:5). 육중한 그의 몸이 매달린 줄은 끊어져 몸이 곤두박질쳤고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오게 되었다(행1:16). 죄책감을 갖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 할지라도 만약 자살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였다면 어땠을까? 마치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아니하심과 같이, 부활의 예수님은 분명히 죄사함의 은총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또 유다는 온전히 변화되어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순교자의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진두지휘했던 사울도 회개하여 사도바울이 되었으며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도 더 크게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회개를 하였느냐이다. 이러한 자는 결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될지언정 결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왜 성령을 거역/훼방하는 죄는 죄사함은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성령을 거역/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3번 즉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3:28-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누가복음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10)

이 3번의 말씀을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보면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동일한 사건으로 첫 번째 사건이다. 이는 예수께서 복음 초기 갈릴리 지역인 가버나움에서 말씀으로 예수님의 병고침과 기적을 비방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대상이다.

반면 누가복음의 기록은 첫 번째 사건의 때와 장소, 대상이 다른 두번째 사건이다. 이는 예수의 공생애의 말기에 예루살렘 지역에서 있던 일이다. 당시 유대 교권자들은 어떻게든 흠을 잡아 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많은 군중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두 번이나 예고하신 후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었던 대상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물론 여기에 베드로를 포함하여 가룟유다도 포함돼 있다.

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설교하셨을까? 전자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후자는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심지어 저주했던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수제자의 길을 갔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기도 했지만 자살함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여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던져지게 됐다.

자살을 하면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죄사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절대로 죄사함을 얻지 못한 아주 작은 죄가 있는 자라도 천국으로 들어오게 하실 수 없다.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자는 중생(Regeration)과 성화(Sactificaton)과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필히 거치게 된다.

중생과 성화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나며, 영화는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난다. 중생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개인이 심령에 받아들여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중생은 일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화는 이미 중생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점진, 상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육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온전한 100% 성화를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는 중생하여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즉 그 영혼과 육이 분리될 때 우리의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100% 성화시키어 영화의 상태로 승하시키신다.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거룩함에 이루게 변화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영화도 일순간에 이루어지며, 바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던 자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의지의 행위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을 성령을 훼방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되니 이러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 또한 중요하다. 십자가 선상에서 한편 강도는 죽음의 선상에서 예수를 믿고 회개함으로 낙원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를 삼년반 동안 따랐으나 결국 자살하여 영원한 지옥에 고통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어떻게 믿는 가에 따라 우리의 중생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우리의 성화가, 어떻게 죽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화가 결정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를 사랑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성경은 말씀해 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위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심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참된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 안에서 죽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이 이루는 영화로운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중에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린 신앙인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살하려는 생각이나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도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에 자살하려 했던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간수가 믿음으로 그와 온 가족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절망 가운데 헤매는 자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저들을 흑암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질문이 있으시거나 이 글을 읽다가 의문된 것이 있으시면 atlantabc@gmail.com으로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