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 지는 곳

아이비 시내가 흐르고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영생장로교회 새성전에서 김영환 목사를 만났다. 85번 고속도로 111번 출구에서 내려 10여분, 큰 길가에서 조금 벗어난 ‘나뭇잎 호수 길(Leaf Lake Drive)’ 끝자락에 위치한 영생장로교회는 고즈넉한 주변 자연과 하나된 듯, 평안한 고요를 풍기고 있다.

“지난 여름에 예배를 드리던 미국교회에서 갑자기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어요. 당장 비워야 하는 상황에서 우연히 신문을 보다 발견한 지금 이곳을 브로커와 함께 와보니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벌써 팔렸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주시겠지 싶어 기다렸는데 먼저 산 사람이 감당이 안됐는지 계약을 파기했죠. 덕분에 처음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어요. 좋은 집인데 관리가 안 돼서 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바닥부터 지붕까지 손 안댄 곳이 없을 정도니까요. 이곳을 멋있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선교’, 즉 ‘미시오 데이(Missio Dei)’가 이뤄지는 곳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11.49 에이커에 달하는 대지 위에 서 있는 주택은 교회로, 옆에 붙어있는 1530 스퀘어피트 창고는 파라쳐치 혹은 선교를 위한 전문공간으로 계획하고 있다. 대략적인 공사가 끝나는 대로 소장하고 있는 책 3000여권과 한국에서 지인에게 받을 책까지 더해 1-2만권의 도서를 갖춘 도서관도 들어선다. 세미나, 예배 등의 모임은 물론 널찍한 파티오에서 선교 사진전도 개최하고, 날씨가 좋을 때는 교회를 둘러싼 자연 속에서 야외예배도 드리며 마음껏 하나님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득하다.

빨치산에 희생된 아버지, 보따리 장사 어머니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이 가까운 시골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김영환 목사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지리산 일대에서 극성을 부리던 빨치산에 의해 부친이 피살되는 비극을 겪었다. 유복녀로 태어난 여동생까지 4남매를 부양해야 했던 어머니는 친척이 있던 전라남도 광주로 이사해 보따리 장사로 생활을 이어갔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김영환 목사도 어릴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야간으로 학업을 이어가며 중학생 때는 신문배달과 아이스케키 장사,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 사환으로 일하면서 여름에는 생활 필수품을 넣고 다니는 장사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입주 가정교사로, 가정교사를 그만 둔 이후에는 포장마차 호떡장사까지…… 어찌 보면 밑바닥의 삶이었지만 신실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만큼은 굳건했다.

“남편을 잃고 유복녀를 낳은 어머니께서 이웃 장로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는데 평생 주님만 의지하신 귀한 분입니다. 수십 년 동안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를 빼놓지 않았고, 철야기도를 열심히 다니셨어요. 그 어려운 중에도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해서 구겨진 돈은 다리미로 다려서까지 정성을 다해 헌금하셨죠. 저도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라 신문배달을 해서 번 돈을 십일조 하기 시작했어요.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50년이 넘은 십일조 함은 저의 집에서 가장 귀한 물건인데, 가장 힘들 때도 매일 십일조를 떼어 넣는 신앙의 유산도 함께 물려 받았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소천한 모친을 회상하며 금새 김영환 목사의 얼굴에는 존경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은 씨앗이 되어, 젊은 나이에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받았다. 그 열매의 하나가 바로 김영환 목사의 두 자녀이기도 하다.

▲아이비 시내가 흐르고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영생장로교회 새성전

32살 젊은 장로, 하나님 더 알고 싶은 소망에 미국으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김영환 목사는 1979년 당시 서울에서 중형교회에 속한 장로교 합동측 대성교회에서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 교단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젊은 장로로 꼽힐 정도였다. 그 전부터 교단 내 청장년연합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평신도 사역을 하던 그는 장로안수를 계기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게 됐고, 80년대 초 어지러운 한국 상황과 맞물려 신학공부를 위한 미국유학을 결단하게 된다.

“1982년 36살에 혼자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90년 5월까지 신학을 공부하면서 델라웨어 강을 따라 들어오는 82개국 선원들을 상대로 한 선원선교원의 전임 선교사로 사역을 했죠. 이후 한국 광신대학 교수로 초빙 받아 선교학 교수로 재직하다 1998년 미국에 다시 입국했는데 그때 나이가 오십 이었어요. 지금까지 근 20년간 가르치는 일을 많이 했는데, 지난 11월 28일 지금의 성전에 입당을 ‘터닝 포인트’로 삼아 지금까지와 다른 ‘색다른 사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영환 목사가 처음의 결단대로 신학공부를 할 수 있던 것은 사모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 사모는 안정적인 약국 운영을 내려 놓고 남편을 따라 1년 뒤에 아이들과 함께 미국땅을 밟은 이후 봉제공장, 세탁소, 가게 등 23년간 부지런히 일하며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월세 260불 반지하 아파트에서 9년을 살면서, 버스와 지하철을 네 번씩 갈아타고 등, 하교 하며 공부한 두 자녀는 모두 명문대를 나와 아들은 특허법 변호사로, 딸은 전문직에서 일하고 있다.

자녀양육의 비결을 묻자 그는 많이들 물어 오지만 별다른 비결은 없다고 웃으며 “부모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 “신앙은 가정에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삶으로 모범을 보여라”라고 답했다.

철저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를 바꾼다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김영환 목사는 크리스천이라면 철저하게 의식화되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이에 대해 자세히 묻자 예수님의 삶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예수님은 당시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개혁해 나가려고 하셨다고 언급하며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교회 안에만 머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이 가장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예로 든 그는 당시 법대로 하면 비인간적인 처형을 받아야 했지만, 바울 사도는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그를 받으라’ 권했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하고 섬겼던 여성들도 당시에는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존재였다고 설명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 인간이 마땅히 누릴 자유와 평화에 대해 말씀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고, 불의한 것에 침묵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해 봐야죠. 그렇다고 사회개혁운동가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철저히 크리스천 마인드로 의식화 되야 한다는 겁니다.”

이민교회, ‘위로자’ 되신 예수님 너머 ‘구원의 진리’ 선포해야

목회철학에 대한 질문에 김영환 목사는 주저 없이 “성경중심”이라고 답했다. 목사의 특권이 ‘설교’라면,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전령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군대의 전령을 보세요. 상부에서 노란 봉투에 ‘일급비밀’이라고 찍혀서 내려오면 절대 열어보지 않고 전달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중심으로 전해야지, 자꾸 내 생각과 철학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이민교회 설교의 많은 부분이 위로자 되신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복음의 핵심은 위로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영원한 구원에 있죠. 몇 십 년 교회를 다녀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예수가 바로 참 하나님이고, 구원자라는 것, 이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저의 목회 철학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배고픈 자에게는 귀가 없다’는 나이지리아 속담을 이야기 했다.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육적인 배고픔도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설교(word)와 행동(deed)이 새의 두 날개처럼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알려진 PCA 교단에 속한 영생장로교회는 ‘설교와 가르침, 치유’에 초점을 두고 철저히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영생장로교회는 200 Leaf Lake Drive Suwanee GA 30024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문의 (678) 939-9460, (770) 682-6332.